불굴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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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 스티븐 앰브로스
• 출판사 : 뜨인돌
• 가격 : 38,000원
• 책꼴/쪽수 :
152x225, 816쪽
• 펴낸날 : 2009-01-05
• ISBN : 9788958072478
• 십진분류 : 역사 > 전기 (990)
• 도서상태 : 정상
저자소개
지은이 : 스티븐 앰브로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겸 전기작가. 1960년부터 1995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캔자스 주립대학,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존스홉킨스 대학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사의 권위자이며, 그중에서도 디데이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전후 연합군의 활약을 그린 여러 권의 논픽션을 발표해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그의 저서는 하나같이 방대한 자료에 탁월한 이야기 솜씨가 곁들여짐으로써 전문적인 역사서와 대중적인 논픽션의 경계를 허문 고급 교양서로 평가된다. 특히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디데이(D-Day)』(1994년)에는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아시아계 독일군 포로의 사진이 수록되어 우리나라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물론, 조정래의 소설 『오 하느님』(2007년)에도 영감을 제공한 바 있다. 『불굴의 용기』는 저자의 관심이 미국 초기 역사로 되돌아간 예외적인 경우로,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을 다룬 지금까지의 수많은 논픽션 가운데서도 최고의 역작으로 손꼽힌다. 그는 또한 미국의 전직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리처드 닉슨의 전기를 발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이젠하워의 경우, 앰브로스의 책을 읽고 탁월한 글 솜씨에 반해 공식 전기 집필을 의뢰했지만, 완성된 전기에서는 의외로 그의 실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많이 담겨 있어 공정한 태도를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닉슨의 경우에는 앰브로스가 일찍이 캔자스 주립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둘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그 학교를 방문한 닉슨의 연설 도중 앰브로스가 야유를 퍼붓는 소동 끝에 해직되고 말았고, 그로 인해 피차 결코 호의적인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앰브로스의 닉슨 전기 역시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며 닉슨의 실책 못지않게 업적도 강조하여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또한 영화 쪽에도 활발히 관여하여, 각종 다큐멘터리는 물론 디데이를 소재로 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1998)에서 자문을 담당했으며, 2001년에는 본인의 저서인 베스트셀러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1992)의 미니시리즈 제작에 스티븐 스필버그, 톰 행크스와 함께 공동 제작자로 참여했다. 이 미니시리즈는 에미상 6개 부문을 수상하며 격찬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되어 호평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그 외에도 『시민군(Citizen Soldiers)』(1997), 『대륙횡단철도(Nothing Like It in the World)』(2000), 『와일드 블루(The Wild Blue)』(2001) 등이 있다.
목차
서문 초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만들어낸, 역사상 가장 놀라운 모험담
감사의 말
1. 청년기 (1774∼1792년)
2. 농장주 (1792∼1794년)
3. 군인 (1794∼1800년)
4. 토머스 제퍼슨 시대의 미국 (1801년)
5. 대통령 비서 (1801∼1802년)
6. 원정의 발단 (1750∼1802년)
7. 원정 준비 (1803년 1∼6월)
8. 워싱턴에서 피츠버그까지 (1803년 6∼8월)
9. 오하이오강을 따라 (1803년 9∼11월)
10. 미시시피강을 따라 겨울 캠프까지 (1803년 11월∼1804년 3월)
11. 출발 준비 (1804년 4월∼5월 21일)
12. 미주리강을 따라 상류로 (1804년 5∼7월)
13. 인디언의 영토에 들어서다 (1804년 8월)
14. 수족과의 만남 (1804년 9월)
15. 만단족 마을을 향해 (1804년 가을)
16. 포트만단의 겨울 캠프 (1804년 12월 21일∼1805년 3월 21일)
17. 포트만단에서의 보고 (1805년 3월 22일∼4월 6일)
18. 포트만단에서 마리아스강까지 (1805년 4월 7일∼6월 2일)
19. 마리아스강에서 그레이트폴스까지 (1805년 6월 3일∼20일)
20. 힘겨운 행군 (1805년 6월 16일∼7월 14일)
21. 쇼쇼니족을 찾아서 (1805년 7월 15일∼8월 12일)
22. 대륙분수계를 넘어 (1805년 8월 13일∼31일)
23. 루이스가 바라본 쇼쇼니족
24. 비터루트산맥 통과 (1805년 9월 1일∼10월 6일)
25. 컬럼비아강을 타고 하류로 (1805년 10월 8일∼12월 7일)
26. 포트클랫솝 (1805년 12월 8일∼1806년 3월 23일)
27. 루이스가 바라본 클랫솝족과 치누크족
28. 제퍼슨과 미국 서부 (1804∼1806년)
29. 네즈퍼스족 인디언과의 재회 (1806년 3월 23일∼6월 9일)
30. 롤로 오솔길 (1806년 6월 10일∼7월 2일)
31. 마리아스강 탐사 (1806년 7월 3일∼28일)
32. 마지막 구간 (1806년 7월 29일∼9월 22일)
33. 대통령께 드리는 보고 (1806년 9월 23일∼12월 31일)
34. 워싱턴 (1807년 1∼3월)
35. 필라델피아 (1807년 4∼7월)
36. 버지니아 (1806년 8월∼1807년 3월)
37. 세인트루이스 (1808년 3∼12월)
38. 세인트루이스 (1809년 1∼8월)
39. 마지막 여정 (1809년 9월 3일∼10월 11일)
40. 후일담
역자후기
후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감사의 말
1. 청년기 (1774∼1792년)
2. 농장주 (1792∼1794년)
3. 군인 (1794∼1800년)
4. 토머스 제퍼슨 시대의 미국 (1801년)
5. 대통령 비서 (1801∼1802년)
6. 원정의 발단 (1750∼1802년)
7. 원정 준비 (1803년 1∼6월)
8. 워싱턴에서 피츠버그까지 (1803년 6∼8월)
9. 오하이오강을 따라 (1803년 9∼11월)
10. 미시시피강을 따라 겨울 캠프까지 (1803년 11월∼1804년 3월)
11. 출발 준비 (1804년 4월∼5월 21일)
12. 미주리강을 따라 상류로 (1804년 5∼7월)
13. 인디언의 영토에 들어서다 (1804년 8월)
14. 수족과의 만남 (1804년 9월)
15. 만단족 마을을 향해 (1804년 가을)
16. 포트만단의 겨울 캠프 (1804년 12월 21일∼1805년 3월 21일)
17. 포트만단에서의 보고 (1805년 3월 22일∼4월 6일)
18. 포트만단에서 마리아스강까지 (1805년 4월 7일∼6월 2일)
19. 마리아스강에서 그레이트폴스까지 (1805년 6월 3일∼20일)
20. 힘겨운 행군 (1805년 6월 16일∼7월 14일)
21. 쇼쇼니족을 찾아서 (1805년 7월 15일∼8월 12일)
22. 대륙분수계를 넘어 (1805년 8월 13일∼31일)
23. 루이스가 바라본 쇼쇼니족
24. 비터루트산맥 통과 (1805년 9월 1일∼10월 6일)
25. 컬럼비아강을 타고 하류로 (1805년 10월 8일∼12월 7일)
26. 포트클랫솝 (1805년 12월 8일∼1806년 3월 23일)
27. 루이스가 바라본 클랫솝족과 치누크족
28. 제퍼슨과 미국 서부 (1804∼1806년)
29. 네즈퍼스족 인디언과의 재회 (1806년 3월 23일∼6월 9일)
30. 롤로 오솔길 (1806년 6월 10일∼7월 2일)
31. 마리아스강 탐사 (1806년 7월 3일∼28일)
32. 마지막 구간 (1806년 7월 29일∼9월 22일)
33. 대통령께 드리는 보고 (1806년 9월 23일∼12월 31일)
34. 워싱턴 (1807년 1∼3월)
35. 필라델피아 (1807년 4∼7월)
36. 버지니아 (1806년 8월∼1807년 3월)
37. 세인트루이스 (1808년 3∼12월)
38. 세인트루이스 (1809년 1∼8월)
39. 마지막 여정 (1809년 9월 3일∼10월 11일)
40. 후일담
역자후기
후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편집자 추천글
루이스와 클라크의 863일간 8천 마일의 대장정, 미국과 세계 역사를 바꿔 놓다!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 당시, 13개 식민주로 이루어진 대서양 연안 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신흥국가 미국.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주인공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1803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으로부터 광대한 영토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에 사들인다. 루이지애나 매입 후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신뢰했던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를 서북쪽으로 파견하여 세인트루이스에서 로키산맥을 넘어 오리건까지 8천 마일에 이르는 장대한 역사적 탐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미연방의회는 제퍼슨의 이 야심만만한 도전에 강하게 반발하고, 설상가상으로 영국과의 전쟁 위험이 일촉즉발의 위기로 다가오는데…….
국내외적으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성공 가능성이 지극히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미지의 땅으로 루이스와 클라크의 탐사부대를 파견하는 제퍼슨. 그의 이 거대한 모험이 향후 미국과 세계 역사의 진로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초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만들어낸, 역사상 가장 놀라운 모험담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또한 그들의 업적이 오늘날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200년이라는 긴 시간의 경과, 게다가 우리의 역사도 아닌 미국사에서 일어났던 한 가지 에피소드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연 무슨 의미를 줄까?
첫째, 『불굴의 용기』는 그 자체로 손색없는 하나의 뛰어난 모험담이다. 30대 초반의 두 지휘관이 당시 최고의 군인들과 사냥꾼들을 불러 모아,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야생의 오지를 탐험한다는 이야기는 섀클턴의 이야기나 다른 어떤 모험 실화 못지않은 순수한 재미를 선사해준다. 남극이나 북극이 아니라 오늘날의 미국이 있는 바로 그 땅을 탐사한 것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은 선입견도 가질 수 있지만, 오로지 루이스와 클라크의 증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풍요로운 낙원 같은 루이지애나의 야생은 대단한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배를 타고 강을 따라가고, 높은 산맥을 건너며, 갖가지 신기한 야생동물이며 자연현상과 만나고, 호전적인 인디언 부족들과의 일전을 각오해야 하는 등, 어지간한 소설 못지않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둘째로 초창기의 미국사다. 비록 메리웨더 루이스의 생애와 원정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과 루이지애나 매입이라는 중대한 사건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루이지애나 매입은 미국의 국토를 단숨에 2배로 늘려놓았으며, 그곳에 포함된 막대한 자원은 이후 서부 개척시대의 열풍을 불러왔고, 급기야 미국의 영토가 태평양 지역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줌으로써, 사실상 오늘날의 초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마련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특히 이 책에 서술된 바, 제퍼슨과 루이스라는 당대 최고의 정치인과 지성인이 지닌 서부관을 보면, 미국의 이른바 프런티어 정신의 실체는 물론이고 이후 인디언을 탄압하면서까지 적극적인 팽창 정책에 나서게 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탁월한 리더십 지침서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리더십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상당히 흥미로운 사례로서 연구 가치가 있다. 직관적이고 다혈질이며 글쓰기와 자연 관찰에 유능했던 루이스와, 차분하고 인내심 많으며 행정 업무와 지도 작성에 탁월했던 클라크는 그 성격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재능에 있어서도 지극히 상보적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이 없었더라면 과연 원정이 성공했을지 차마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다. 물론 두 사람이 항상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은 아니지만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단점을 이해했기에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의 탁월한 리더십이 드러난 사례는 마리아스강 하구에서의 일이다. 인디언들조차 몰랐던 또 다른 강의 상류가 나타나자, 원정대는 과연 어느 쪽이 진짜 미주리강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대원들은 오른쪽이라고 생각하지만, 두 지휘관은 직접 답사를 다녀오고, 기존 정보를 토대로 추론을 거듭한 끝에 왼쪽이 진짜 미주리강이라고 정확하게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대원들이 여전히 오른쪽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왼쪽으로 가자는 두 지휘관의 지시에 기꺼이 따랐다는 점이다. 차라리 갔다가 잘못되어 되돌아올망정, 두 지휘관의 견해를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대원들이 루이스와 클라크에게 보낸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최악의 결과를 앞에 놓고서도 “계속 전진하기로” 한 것이라든지, 험한 산맥을 넘다가 곤경에 부딪치자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선뜻 “처음이자 마지막”인 후퇴를 지시한 것 역시, 두 지휘관이 지닌 탁월한 리더십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두 사람 역시 완벽한 인간까지는 아니어서 종종 실수도 하고, 자책도 하며, 부하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부과하기도 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디언들에게 거짓말도 한다. 하지만 그런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와 단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분명한 목표의식을 갖고 원정을 진행해나갔으며 놀라운 성공으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이 책은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원정대에서도 가장 특별한 인물이었던 요크와 사카가위아에 대한 것이 대표적이다. 가령 요크에 얽힌 이야기는 이후 60여 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종식되는 노예제도의 어두운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주인인 클라크를 따라 원정대의 일원이 되어 대륙 횡단에 성공한 것은 개인으로서는 영예인지 몰라도, 그 개인으로서는 지극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다녀온 뒤에 해방시켜 달라고 요구했다가 도리어 주인에게 배은망덕한 놈으로 매도당한 것을 보라.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탄생한 지금에 와서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바로 그 당시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인디언 여성 사카가위아의 이야기는 이 모험담에서도 가장 인상적이며, 또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본래 로키산맥 인근에 사는 쇼쇼니족 출신이었던 그녀는 미주리강 중류의 히다차족에게 사로잡혀 와서 결국 백인 교역상 샤르보노의 소유가 된다. 이후 샤르보노가 원정대에 통역으로 참가하게 되자, 사카가위아는 낳은 지 2개월밖에 안 되는 아들 폼프를 데리고 함께 원정대에 참여한다. 원정 도중에 그녀는 통역과 안내 말고도 종종 야생 채소를 구해오고, 갖가지 자질구레한 일을 담당하며 원정대의 일원으로서 크게 기여한다. 아울러 이 책에 묘사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생활상 역시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주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선언과 독립전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한 지 20여 년이 지난 뒤인 1803년, 미국은 오늘날의 영토 가운데 대서양 쪽의 3분의 1만을 차지한 신흥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취임 3년째를 맞이한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매입한다. 오늘날 미국 영토의 한가운데 3분의 1 가량을 차지하는 이 광대한 땅을 획득함으로써, 제퍼슨은 눈 깜짝할 사이에 국토를 두 배로 늘려 버린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당시 미국이나 프랑스는 물론이고 세계의 어느 누구도 이 루이지애나(지금의 루이지애나주와는 다름)라는 영토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워낙 방대한 영토에, 미국인들에겐 대부분 전인미답의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곳에 대한 조사 및 보고가 절실한 실정이었다. 이에 제퍼슨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개인비서 메리웨더 루이스 대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원정대를 조직하고, 의회를 설득해 대대적인 지원에 나선다.
원정대의 일차적인 목표는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완전수로(an All Water Route)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원정대는 당시 모피 무역의 전진기지 노릇을 하던 세인트루이스에서 출발해 대륙 중부를 관통하는 미주리강을 거슬러 북서쪽으로 올라간 다음, 로키산맥을 넘어 컬럼비아강을 따라 내려가 태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로 한다. 만약 미주리강 상류와 컬럼비아강 상류 사이를 연결해주는 가깝고도 편리한 육로가 있을 경우, 미국은 동서를 관통하는 사실상의 완전수로를 얻게 되어, 내륙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토대로 한 모피 무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막중한 책임을 맡은 루이스는 원정 준비에 분주한 와중에도, 한때 군 동료였으며 절친한 친구인 윌리엄 클라크에게 공동 지휘관직을 제안한다. 직관적이고 다혈질인 자신의 능력에 차분하면서 인내심 많은 친구의 능력이 합쳐지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루이스의 제안에 클라크가 흔쾌히 응낙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굳건한 우정의 예로 손꼽히며, 심지어 두 사람을 한 몸인 양 일컫는 ‘루이스 앤드 클라크’의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원정 준비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애초에 10여 명 규모로 잡았던 인원은 금세 수십 명 규모로 늘어났고, 클라크의 지위 결정을 둘러싼 민망한 문제도 있었다. 애초에 루이스는 클라크를 자신과 똑같은 대위 계급의 공동 지휘관으로 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료주의적 절차상의 문제로 인해 결국 루이스보다 아래인 중위 계급의 부지휘관으로 임명장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 사실을 대원 중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클라크를 자신과 마찬가지로 ‘캡틴’(군 계급으로는 ‘대위’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대장’이란 뜻이다)이라고 호칭하도록 한다. 두 사람의 이런 신뢰와 우정이야말로 원정이 거둔 성공의 기폭제가 되었다.
수 개월간의 지체 끝에 마침내 1803년 5월 14일, 세인트루이스를 출발해 원정을 시작했을 때의 인원은 뱃사람을 포함해 모두 54명, 그리고 5개월간의 여정 끝에 만단 족 마을에 도착해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4월에 원정을 재개했을 때, 대원들의 숫자는 모두 33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각지의 군부대에서 최고의 병사들을 선발하고, 숙련된 사냥꾼을 시기적절하게 특채했으며, 중도에 말썽을 일으킨 대원은 퇴출한 정예 중의 정예였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프랑스인 교역상과 함께 살고 있던 인디언 여성 사카가위아가 통역자로 동행했으며, 심지어 그녀가 낳은 2개월 된 아기까지도 원정대에 동반했다는 사실이다. 원정대의 또 다른 특이한 대원으로는 흑인 요크가 있었는데, 그는 클라크의 노예였다.
원정대는 이후 미주리강 상류의 강한 물살이며, 무시무시한 회색곰과의 싸움, 카누가 전복될 뻔한 위기, 그리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강의 분기점에서 자칫 길을 잘못 들 뻔한 사건 등, 갖가지 역경을 극복하며 서쪽으로 향한다.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의 등뼈에 해당하는 대륙분수계의 능선에 올랐을 때, 루이스는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 앞에서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만다. 일찍이 원정을 떠나기 전만 해도 제퍼슨과 루이스는 대륙분수계를 넘기만 하면 바로 컬럼비아강이 나올 것이라고, 그 강을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태평양이 금방 나타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능선에 오른 루이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거대한 산맥이었던 것이다. 바로 로키산맥이었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에 후세 사람들이 감히 ‘위대한’이라는 말을 붙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다. 본래의 계획이나 예상과는 완전히 어긋난 상황을 맞이하여, 대장인 루이스와 클라크는 숙고 끝에 ‘계속 전진하기로’ 결정한다. 앞으로 뭐가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태평양까지 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들은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로키산맥의 일부분인 비터루트산맥을 넘었고, 그토록 고대하던 컬럼비아강에 도달해서 배를 타고 하류로 향한다. 그리고 1805년 11월 20일, 무려 2년 반만의 여정 끝에 4천 마일을 주파하여 드디어 태평양에 도달한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륙 횡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원정대의 여정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태평양 연안에서 겨울을 보내고 다시 그 험준한 산맥을 넘어 문명 세계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루이스와 클라크는 대원 전체의 의견을 수렴하여(*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요크와 사카가위아도 당당히 한 표를 행사했는데, 흑인 노예와 인디언 여자까지 투표에 참가한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5년 흑인 투표권법이 제정됨으로써 흑인도 투표할 권리를 갖게 되었고, 1890년 와이오밍주가 처음으로 주 헌법으로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했으며, 1920년이 되어서야 연방 전체가 비로소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점을 감안할 때 비록 성숙한 정치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보다 자그마치 100여 년 전, 혹은 150여 년 전 여성과 흑인의 투표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겨울 숙영지를 건설하지만, 식량과 보급품의 부족으로 인한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심지어 이들은 인디언들에게 개를 사서 잡아먹는가 하면(*“대원들은 줄곧 그 지역 인디언들로부터 개를 사서 식용으로 썼지만, 클라크는 원정대에서 유일하게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14일, 클라크는 오리 몇 마리를 잡아 무려 3주일 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기운을 차렸다.” -본문 464쪽 중에서), 필요한 경우에는 장작이나 카누를 도둑질하기까지 한다. 원정용으로 마련한 보급품 가운데 이미 95퍼센트를 써버린 상황에서, 이들은 하루속히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북서 해안의 춥고 습한 겨울을 보낸다.
드디어 봄이 오자 원정대는 태평양을 떠나 다시 귀로에 오르지만, 여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힘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식량과 보급품의 부족이었다. 원정대로선 선뜻 시인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사실 이들의 성공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인디언들의 호의적인 도움이었다. 물론 때로는 적대적인 행위를 하기도 했고, 곤란에 빠진 원정대의 처지를 이용해 이득을 챙기기도 했지만, 실제로 인디언들이 헐값에 식량과 말을 제공해주지 않았더라면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1년 전, 비터루트산맥을 넘으면서 단단히 고생했던 원정대였지만, 이번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이 너무 앞선 까닭인지 그만 대단한 실책을 범하고 만다. 늦봄이 될 때까지는 눈이 쌓여서 통행할 수 없다는 인디언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예정보다 며칠이나 일찍 서둘러 출발했다가 결국 얼마 못 가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에서 유일하게 ‘전진’ 아닌 ‘후퇴’를 감행한 때였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루이스는 후한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인디언 길잡이들을 여럿 고용해서, 1년 전에 비하면 무척이나 수월하게 산맥을 넘는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루이스는 또 한 가지 중대한 실책을 범하고 만다. 원정의 성과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욕심이 지나쳤던 나머지, 미처 탐사하지 못한 지역을 돌아보기 위해 원정대를 여러 조로 나누어 운영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가령 루이스와 9명의 대원들은 루이지애나의 북쪽 경계 확인을 위해 마리아스강을 따라 올라가고, 클라크와 10명의 대원들은 옐로스톤강을 타고 내려가고, 그 외에도 두세 개 조가 저마다의 임무를 맡아 흩어지기로 한 것이다. 이들에게 적대적인지 호의적인지 알 수도 없는 인디언들이 횡행하는 지역 한가운데서 병력을 나눈 루이스의 결정이야말로, 자칫하면 원정 전체를 물거품으로 만들 뻔한 위험천만한 오판이었다.
결국 루이스는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된 판단에 대해 크나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즉 루이지애나의 북쪽 경계가 북위 49도 아래에 있다는 낙심천만한 결과를 확인하고 발길을 돌리려던 즈음, 우연히 그 일대를 호령하는 블랙푸트족의 인디언 전사들과 마주쳐 시비가 붙었고, 결국 그중 몇 명을 살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루이스 일행은 다행히도 무사히 본대와 합류하여 원정을 성공으로 이끌지만, 블랙푸트족과 미국인 사이에 생겨난 숙원은 이후 오랫동안 이어지며, 인디언과 백인 양측 모두에게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금의환향한 루이스와 클라크, 그리고 대원들은 대단한 찬사와 함께 막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의 업적이 일반에 제대로 알려지기까지는 이후 8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야만 했다. 문제의 원인은 바로 이 원정의 가장 큰 수혜자인 루이스였다. 그가 원정 내내 소중히 간직하며 기록한 일지야말로 이들의 업적을 모두의 앞에 증명해줄 산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찌된 일인지 일지의 출간을 위한 작업에 소극적이었고, 그리하여 일지가 결국 출간되었을 무렵에는 이들의 발견이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시 발견된 다음이었거나, 또는 이들이 붙여준 강이나 산의 이름이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시 지어진 다음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루이스에게는 크나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의 후광에 도취된 그는 제퍼슨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준주 지사라는 중요한 관직에 임명되지만, 천생 군인 체질이었던 그에겐 행정가로서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게다가 융통성 없는 고지식함 때문에 친구보다는 적을 더 많이 만들어냈으며, 나아가 금전관리에 대한 무관심과 서투름이 원인이 되어 무의식중에 남발한 어음이 신용 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집안내력이라 할 수 있는 우울증까지 가세하여 그는 그만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생전에도 루이스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믿음직스러운 동료였던 클라크는 원정일지의 출간이라는 또 한 가지 남은 임무를 고스란히 떠맡는다. 세상을 떠난 친구만큼의 필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클라크는 타고난 성실성과 인내를 바탕으로 전문 문필가들의 도움을 받아 1814년에 일지의 초판을 출간한다. 루이스의 사후 5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루이스와 클라크의 업적도 세간에서 잊혀지고, 그 일지가 작성되었을 때만 해도 미지의 땅이었던 미국 서부에는 이미 개척자와 사냥꾼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된 다음이었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이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후 원정일지의 무삭제 완전판과 서한집 등의 자료가 새로운 편집을 통해 재출간되면서부터였다. 이전에는 단순히 북서지방에 대한 정찰 정도로만 여겨졌던 이들의 원정이야말로 오늘날에 와서는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자료의 보고임이 드러났던 것이다. 특히 원정대와 만났던 인디언 부족들이며, 자연 경관 가운데 상당수가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비록 단편적이라 하더라도 이들의 일지야말로 과거를 증언하는 소중한 기록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비운의 영웅 루이스로선 무려 100여 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업적에 걸맞은 보상을 받은 셈이었다.
내용 요약 - 미국과 세계 역사를 바꾼 토머스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매입과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선언과 독립전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한 지 20여 년이 지난 뒤인 1803년, 미국은 오늘날의 영토 가운데 대서양 쪽의 3분의 1만을 차지한 신흥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취임 3년째를 맞이한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매입한다. 오늘날 미국 영토의 한가운데 3분의 1 가량을 차지하는 이 광대한 땅을 획득함으로써, 제퍼슨은 눈 깜짝할 사이에 국토를 두 배로 늘려 버린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당시 미국이나 프랑스는 물론이고 세계의 어느 누구도 이 루이지애나(지금의 루이지애나주와는 다름)라는 영토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워낙 방대한 영토에, 미국인들에겐 대부분 전인미답의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곳에 대한 조사 및 보고가 절실한 실정이었다. 이에 제퍼슨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개인비서 메리웨더 루이스 대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원정대를 조직하고, 의회를 설득해 대대적인 지원에 나선다.
원정대의 일차적인 목표는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완전수로(an All Water Route)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원정대는 당시 모피 무역의 전진기지 노릇을 하던 세인트루이스에서 출발해 대륙 중부를 관통하는 미주리강을 거슬러 북서쪽으로 올라간 다음, 로키산맥을 넘어 컬럼비아강을 따라 내려가 태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로 한다. 만약 미주리강 상류와 컬럼비아강 상류 사이를 연결해주는 가깝고도 편리한 육로가 있을 경우, 미국은 동서를 관통하는 사실상의 완전수로를 얻게 되어, 내륙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토대로 한 모피 무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막중한 책임을 맡은 루이스는 원정 준비에 분주한 와중에도, 한때 군 동료였으며 절친한 친구인 윌리엄 클라크에게 공동 지휘관직을 제안한다. 직관적이고 다혈질인 자신의 능력에 차분하면서 인내심 많은 친구의 능력이 합쳐지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루이스의 제안에 클라크가 흔쾌히 응낙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굳건한 우정의 예로 손꼽히며, 심지어 두 사람을 한 몸인 양 일컫는 ‘루이스 앤드 클라크’의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원정 준비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애초에 10여 명 규모로 잡았던 인원은 금세 수십 명 규모로 늘어났고, 클라크의 지위 결정을 둘러싼 민망한 문제도 있었다. 애초에 루이스는 클라크를 자신과 똑같은 대위 계급의 공동 지휘관으로 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료주의적 절차상의 문제로 인해 결국 루이스보다 아래인 중위 계급의 부지휘관으로 임명장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 사실을 대원 중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클라크를 자신과 마찬가지로 ‘캡틴’(군 계급으로는 ‘대위’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대장’이란 뜻이다)이라고 호칭하도록 한다. 두 사람의 이런 신뢰와 우정이야말로 원정이 거둔 성공의 기폭제가 되었다.
수 개월간의 지체 끝에 마침내 1803년 5월 14일, 세인트루이스를 출발해 원정을 시작했을 때의 인원은 뱃사람을 포함해 모두 54명, 그리고 5개월간의 여정 끝에 만단 족 마을에 도착해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4월에 원정을 재개했을 때, 대원들의 숫자는 모두 33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각지의 군부대에서 최고의 병사들을 선발하고, 숙련된 사냥꾼을 시기적절하게 특채했으며, 중도에 말썽을 일으킨 대원은 퇴출한 정예 중의 정예였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프랑스인 교역상과 함께 살고 있던 인디언 여성 사카가위아가 통역자로 동행했으며, 심지어 그녀가 낳은 2개월 된 아기까지도 원정대에 동반했다는 사실이다. 원정대의 또 다른 특이한 대원으로는 흑인 요크가 있었는데, 그는 클라크의 노예였다.
원정대는 이후 미주리강 상류의 강한 물살이며, 무시무시한 회색곰과의 싸움, 카누가 전복될 뻔한 위기, 그리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강의 분기점에서 자칫 길을 잘못 들 뻔한 사건 등, 갖가지 역경을 극복하며 서쪽으로 향한다.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의 등뼈에 해당하는 대륙분수계의 능선에 올랐을 때, 루이스는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 앞에서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만다. 일찍이 원정을 떠나기 전만 해도 제퍼슨과 루이스는 대륙분수계를 넘기만 하면 바로 컬럼비아강이 나올 것이라고, 그 강을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태평양이 금방 나타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능선에 오른 루이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거대한 산맥이었던 것이다. 바로 로키산맥이었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에 후세 사람들이 감히 ‘위대한’이라는 말을 붙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다. 본래의 계획이나 예상과는 완전히 어긋난 상황을 맞이하여, 대장인 루이스와 클라크는 숙고 끝에 ‘계속 전진하기로’ 결정한다. 앞으로 뭐가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태평양까지 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들은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로키산맥의 일부분인 비터루트산맥을 넘었고, 그토록 고대하던 컬럼비아강에 도달해서 배를 타고 하류로 향한다. 그리고 1805년 11월 20일, 무려 2년 반만의 여정 끝에 4천 마일을 주파하여 드디어 태평양에 도달한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륙 횡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원정대의 여정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태평양 연안에서 겨울을 보내고 다시 그 험준한 산맥을 넘어 문명 세계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루이스와 클라크는 대원 전체의 의견을 수렴하여(*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요크와 사카가위아도 당당히 한 표를 행사했는데, 흑인 노예와 인디언 여자까지 투표에 참가한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5년 흑인 투표권법이 제정됨으로써 흑인도 투표할 권리를 갖게 되었고, 1890년 와이오밍주가 처음으로 주 헌법으로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했으며, 1920년이 되어서야 연방 전체가 비로소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점을 감안할 때 비록 성숙한 정치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보다 자그마치 100여 년 전, 혹은 150여 년 전 여성과 흑인의 투표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겨울 숙영지를 건설하지만, 식량과 보급품의 부족으로 인한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심지어 이들은 인디언들에게 개를 사서 잡아먹는가 하면(*“대원들은 줄곧 그 지역 인디언들로부터 개를 사서 식용으로 썼지만, 클라크는 원정대에서 유일하게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14일, 클라크는 오리 몇 마리를 잡아 무려 3주일 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기운을 차렸다.” -본문 464쪽 중에서), 필요한 경우에는 장작이나 카누를 도둑질하기까지 한다. 원정용으로 마련한 보급품 가운데 이미 95퍼센트를 써버린 상황에서, 이들은 하루속히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북서 해안의 춥고 습한 겨울을 보낸다.
드디어 봄이 오자 원정대는 태평양을 떠나 다시 귀로에 오르지만, 여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힘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식량과 보급품의 부족이었다. 원정대로선 선뜻 시인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사실 이들의 성공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인디언들의 호의적인 도움이었다. 물론 때로는 적대적인 행위를 하기도 했고, 곤란에 빠진 원정대의 처지를 이용해 이득을 챙기기도 했지만, 실제로 인디언들이 헐값에 식량과 말을 제공해주지 않았더라면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1년 전, 비터루트산맥을 넘으면서 단단히 고생했던 원정대였지만, 이번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이 너무 앞선 까닭인지 그만 대단한 실책을 범하고 만다. 늦봄이 될 때까지는 눈이 쌓여서 통행할 수 없다는 인디언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예정보다 며칠이나 일찍 서둘러 출발했다가 결국 얼마 못 가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에서 유일하게 ‘전진’ 아닌 ‘후퇴’를 감행한 때였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루이스는 후한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인디언 길잡이들을 여럿 고용해서, 1년 전에 비하면 무척이나 수월하게 산맥을 넘는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루이스는 또 한 가지 중대한 실책을 범하고 만다. 원정의 성과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욕심이 지나쳤던 나머지, 미처 탐사하지 못한 지역을 돌아보기 위해 원정대를 여러 조로 나누어 운영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가령 루이스와 9명의 대원들은 루이지애나의 북쪽 경계 확인을 위해 마리아스강을 따라 올라가고, 클라크와 10명의 대원들은 옐로스톤강을 타고 내려가고, 그 외에도 두세 개 조가 저마다의 임무를 맡아 흩어지기로 한 것이다. 이들에게 적대적인지 호의적인지 알 수도 없는 인디언들이 횡행하는 지역 한가운데서 병력을 나눈 루이스의 결정이야말로, 자칫하면 원정 전체를 물거품으로 만들 뻔한 위험천만한 오판이었다.
결국 루이스는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된 판단에 대해 크나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즉 루이지애나의 북쪽 경계가 북위 49도 아래에 있다는 낙심천만한 결과를 확인하고 발길을 돌리려던 즈음, 우연히 그 일대를 호령하는 블랙푸트족의 인디언 전사들과 마주쳐 시비가 붙었고, 결국 그중 몇 명을 살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루이스 일행은 다행히도 무사히 본대와 합류하여 원정을 성공으로 이끌지만, 블랙푸트족과 미국인 사이에 생겨난 숙원은 이후 오랫동안 이어지며, 인디언과 백인 양측 모두에게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금의환향한 루이스와 클라크, 그리고 대원들은 대단한 찬사와 함께 막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의 업적이 일반에 제대로 알려지기까지는 이후 8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야만 했다. 문제의 원인은 바로 이 원정의 가장 큰 수혜자인 루이스였다. 그가 원정 내내 소중히 간직하며 기록한 일지야말로 이들의 업적을 모두의 앞에 증명해줄 산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찌된 일인지 일지의 출간을 위한 작업에 소극적이었고, 그리하여 일지가 결국 출간되었을 무렵에는 이들의 발견이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시 발견된 다음이었거나, 또는 이들이 붙여준 강이나 산의 이름이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시 지어진 다음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루이스에게는 크나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의 후광에 도취된 그는 제퍼슨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준주 지사라는 중요한 관직에 임명되지만, 천생 군인 체질이었던 그에겐 행정가로서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게다가 융통성 없는 고지식함 때문에 친구보다는 적을 더 많이 만들어냈으며, 나아가 금전관리에 대한 무관심과 서투름이 원인이 되어 무의식중에 남발한 어음이 신용 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집안내력이라 할 수 있는 우울증까지 가세하여 그는 그만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생전에도 루이스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믿음직스러운 동료였던 클라크는 원정일지의 출간이라는 또 한 가지 남은 임무를 고스란히 떠맡는다. 세상을 떠난 친구만큼의 필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클라크는 타고난 성실성과 인내를 바탕으로 전문 문필가들의 도움을 받아 1814년에 일지의 초판을 출간한다. 루이스의 사후 5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루이스와 클라크의 업적도 세간에서 잊혀지고, 그 일지가 작성되었을 때만 해도 미지의 땅이었던 미국 서부에는 이미 개척자와 사냥꾼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된 다음이었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이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후 원정일지의 무삭제 완전판과 서한집 등의 자료가 새로운 편집을 통해 재출간되면서부터였다. 이전에는 단순히 북서지방에 대한 정찰 정도로만 여겨졌던 이들의 원정이야말로 오늘날에 와서는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자료의 보고임이 드러났던 것이다. 특히 원정대와 만났던 인디언 부족들이며, 자연 경관 가운데 상당수가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비록 단편적이라 하더라도 이들의 일지야말로 과거를 증언하는 소중한 기록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비운의 영웅 루이스로선 무려 100여 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업적에 걸맞은 보상을 받은 셈이었다.
본문 중에서
제퍼슨은 항공여행에서 무려 한 세대 정도를 앞선 인물이었고, 육상여행에서는 마력 이외에 증기력을 이용해 수레를 움직인다는 발상에 매료되었다. 1802년의 예언이 이를 증명한다.
“수레를 움직일 때 증기처럼 강력한 동력원을 도입하는 것은 인간의 지위에 큰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비록 동력원이 다르긴 하지만 제퍼슨은 무려 100년 앞서 자동차를 생각한 셈이었다. 아쉽게도 그는 기차도 구경하지 못하고 죽었다. 수상여행에 대해서만큼은 제퍼슨도 효율을 증대하는 방법을 고안하지 못했다. 19세기 초, 육중하거나 양이 많은 물품은 모조리 배로 운송됐기 때문에 1801년 당시의 미국인은 항상 물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운하를 만든 다음, 갑문을 이용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급류를 우회하는 방법에 대한 계획이 가득 차 있었다. 제퍼슨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강을 넓히고 운하를 파고 도로를 닦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라고 썼다. 문명이 탄생한 이래 그때까지 운송 및 교통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미국인은 셰익스피어를 읽고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을 배출한 사회에 살고 있었지만, 기술은 사실상 고대 그리스에 비해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 물론 더 우수한 무기, 뛰어난 지리학적 지식, 그리고 다른 몇 가지 면에서 고대인을 능가했으나 육상에서든 수상에서든 화물 및 사람을 운반하는 면에서든 고대보다 더 빠르다고 할 수 없었다. 헨리 애덤스는 당시의 정신적 풍조를 이렇게 묘사했다.
“가령 립 밴 윙클이 1800년대 들어 오랜 잠에서 깨어날지라도 한때 조지 왕의 초상화가 걸린 자리에 워싱턴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에게 낯선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60년 뒤, 그러니까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선서를 했을 때 미국인이 막대한 양의 물품을 움직일 수 있는 시간당 거리는 육상(철도의 경우 시속 25마일)에서든 수상(상류행 증기선의 경우 시속 10마일)에서든 1801년에 비해 크게 늘어나 있었다. 운송에서 그토록 짧은 시간에 비약적인 발전이 일어난 것은 그야말로 예기치 못했던 혁명이었다. 제퍼슨 시대에 미시시피강에서 워싱턴 D.C.까지 정보를 전달하려면 무려 6주일이 걸렸으나 링컨의 시대에는 같은 거리임에도 전신을 통해 거의 즉각적으로 전달됐다.
결국 시간과 거리, 산과 강의 의미는 토머스 제퍼슨의 시대와 에이브러햄 링컨의 시대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퍼슨이 북아메리카를 생각할 때 그의 머릿속을 차지한 것은 강이었다. 가까운 미래에 그는 뉴올리언스를 미국의 영토로 흡수할 계획이었고, 이를 통해 서부가 미국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 다음에 그는 대륙의 3분의 2나 되는 서부를 통과하는 완전수로를 찾을 계획이었다.
― 73~75p.
1801년 들어 제퍼슨은 프랑스(나폴레옹)와 에스파냐(나폴레옹의 형)간의 비밀협약으로 루이지애나가 에스파냐에서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재할양이었다. 제퍼슨은 크게 놀랐다. 에스파냐가 그곳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에는 미국도 그곳에 대한 주권을 주장할 수 있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라면 얘기가 달랐다. 제퍼슨은 종종 대책 없는 프랑스 애호가로 불렸지만 이 문제에서만큼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프랑스가 뉴올리언스를 소유하게 되는 날은 그 나라를 최악의 상태에 영원히 속박시키는 형이 선고되는 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영국 함대나 그 나라와 화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 측에 자신의 결심을 알렸다. 동시에 나폴레옹에게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양도함으로써 일찍이 동맹국이었던 두 나라의 전쟁 가능성을 뿌리 뽑자고 제안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제퍼슨은 프랑스를 바다에서 완파하겠다고 장담했으며, 루이지애나에 프랑스군을 상륙시키려는 시도를 한다면 이를 전쟁의 구실로 삼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말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원정부대는 이미 산토도밍고에서 참패를 당하고 있었던 터라 그 식민지를 재정복할 수 없음은 물론 뉴올리언스로 병력을 보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여차하면 영국과 미국이 연합해 프랑스의 해군과 상선을 격침시킬 것이 뻔했다.
고심하던 나폴레옹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그의 천성을 발휘해 그 땅을 비싼 가격에 팔아치울 궁리를 했다. 그 와중에 그때까지 뉴올리언스를 통제하던 에스파냐인은 미국인의 기탁권을 철회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고 미국인은 여전히 뗏목이나 평저선을 이용해 선박에서 항구까지 짐을 직접 나르거나 요금을 지불했다. 어쨌든 루이지애나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나폴레옹뿐이었다. 제퍼슨은 파리 주재 미국 공사인 로버트 리빙스턴(Robert Livingston)에게 지시해 미시시피강 하류에서 항구로 사용할 수 있는 토지를 얻을 수 있도록 했고, 만약 그 일에 실패하면 기탁권을 취소하지 않겠다는 보장이라도 받으라고 지시했다.
제퍼슨은 리빙스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제임스 먼로를 전권공사로 삼아 파리로 보내며 뉴올리언스를 200만 달러에 구입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공화당 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던 제퍼슨은 뉴올리언스를 구입하기 위해 최대 1,000만 달러까지 의회에 승인을 요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분명 합헌적인 일이었다. 그것 말고는 통상을 증대시키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이 미국에 뉴올리언스뿐 아니라 루이지애나 전체를 팔아치울 의향이 있음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 103~105p.
“미주리지역의 운명은 향후 미국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연방의 국경선 밖에 놓인 지역으로는 유일하게 광대한 영토이며 미국 국민이 정착할 최초의 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퍼슨이 최우선으로 삼은 것은 태평양까지의 완전수로를 찾는 것이었다. 이 원정은 갤러틴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에 제퍼슨은 본래의 목표를 상기시켰다.
“이 원정의 최대 목표는 미주리지역의 넓이와 그 비옥함이 많은 인구를 감당할 수 있는지, 즉 오하이오에 상응하는 영토와 마찬가지인지를 확인하는 데 있소.”
그는 루이스에게 토양은 물론 그 지역에 많은 나무 종류를 알아내고 연평균 강수량과 연중 기온차를 추정한 다음 농부들에게 중요한 다른 요인들을 종합해 그 비옥도를 판단하도록 지시했다. 제퍼슨은 갤러틴이 제안한 것을 상당수 채택했지만, 그가 최고통수권자로서 루이스에게 준 지시 내역 최종판에는 탐사와 상업을 농업보다 우선시했다.
“자네의 임무는 미주리강, 그리고 그와 유사한 주요 하천을 탐사해 그 경로는 물론 태평양으로 흐르는 다른 물길과 연결되는지 확인하는 데 있네. 나아가 컬럼비아, 오리건, 콜로라도 또는 다른 강이 상업적 목적을 위한 가장 직접적이고 실현가능한 대륙 횡단 수상연결망을 제공하는지 판별해야 하네.”
구체적으로 제퍼슨은 영국인 교역상들이 미주리강 인근 부족과 교역하기 위해 캐나다에서 내려오는 경로, 그리고 그들의 교역 방법과 관습을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또한 현재 영국인이 주도하고 있는 모피 교역을 어떻게 하면 미주리강의 경로를 이용해 미국인이 독차지할 수 있을지에 관해 제안하도록 했다. 상업에서는 정확한 지도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제퍼슨은 이렇게 지시했다.
“미주리강 하구에서부터 위도와 경도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강의 하구, 급류, 섬, 그리고 다른 지역과 대상 중에서도 자연적으로 두드러지고 지속적인 특징을 지닌 것을 기록하게.”
제퍼슨은 추측한 것과 관찰한 것을 명료하게 기록하도록 지시하면서 여러 개의 사본을 만들어 두되, 그중 하나는 일반 종이보다 습기에 더 잘 견디는 자작나무 종이를 쓰라고 했다.
모피 교역을 하려면 인디언 부족에 관한 지식이 꼭 필요했다. 제퍼슨은 각 부족의 이름과 숫자, 영토의 범위, 다른 부족과의 관계, 언어·전통·유적·주업(농업, 어업, 사냥, 약탈 등 먹고사는 기반), 그리고 그런 활동에 사용하는 기구, 식량, 의복, 주택, 주요 질병과 그 치료법, 법률과 관습을 알아오라고 했다. 그리고 목록의 마지막에 그들이 필요로 하거나 갖추고자 하는 교역 품목과 원하는 정도를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 138~139p.
뉴잉글랜드의 연방당원들은 이 매입에 반대함으로써 역사에서 잘못된 편에 서는 실수를 저질렀다. 어떤 사람은 이 매입을 가리켜 ‘엄청난 저주’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매입이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 연방을 전복시킬 위협이 될 것’이라고 했다.
루이스의 보충 교육을 담당했던 필라델피아의 캐스파 위스타는 이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제퍼슨에게 다음과 같은 축하 편지를 썼다.
“각하께서 우리나라를 위해 수행한 매우 훌륭한 매입입니다. 비록 이 나라에는 그 할양의 범위나 대가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독립선언 이래 벌어진 거래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것으로, 독립선언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거나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매입의 즉각적인 효과 중 하나는 루이스가 훗날 대륙분수계 동편에서 만난 인디언 부족과 그의 관계에 끼친 영향이었다. 이제 인디언들은 미국 영토에 거주하는 셈이었다. 루이스는 그 사실을 인디언들에게 알려줘야 할 책임을 지니게 되었다. 제퍼슨은 루이스가 그들을 미국의 교역망 안으로 끌어들이길 원했고, 루이스는 양측 사이에 평화를 조성하는 동시에 만단족 마을 주위의 영국인에게 이제 그들이 외국에 거주하는 셈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루이지애나의 경계가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아무도 몰랐다.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를 매각하면서 그 영토를 ‘현재 에스파냐의 손에 있는 것과 똑같은 범위, 과거 프랑스 손에 있던 것과 똑같은 범위’라고만 규정했다. 당시의 일반적인 믿음에 따르면 루이지애나는 미시시피강 유역의 서쪽 절반으로 이루어진 땅이었다. 다시 말해 남으로는 멕시코만, 북으로는 미주리강의 북쪽 지류, 동으로는 미시시피강, 서로는 대륙분수계까지 달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지역이 북쪽의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알지 못했기에 매입에 덧붙여 북부의 영토를 더 많이 확보하고 싶어 했던 제퍼슨은 곧바로 루이스에게 북부 지류도 탐사하도록 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공식 지시 내역에서는 그 지역의 남부 지류만 탐사하도록 강조했었다.
제퍼슨은 토지를 원했다. 또한 제국을 원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고, 그중에서도 최우선은 루이지애나의 국경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다. 외교사가인 토머스 메이틀랜드 마셜(Thomas Maitland Marshall)은 그에 대해 훌륭하게 서술했다.
“애초에는 그 매입이 미시시피강 유역의 서쪽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됐지만, 제퍼슨의 개념은 점차 확장됐고 1808년에는 플로리다 서부, 텍사스, 오리건지역을 포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각은 이후 반세기 가까이 미국 외교의 상당 부분에서 근거로 작용했다.”
- 150~152p.
이제는 그 산길의 꼭대기로 올라가 아이다호와 광대한 북서제국을 바라본 최초의 미국인이 탄생할 때가 되었다. 루이스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분계능선의 꼭대기로 향했고, 그곳에서 나는 우리의 서편에 꼭대기가 부분적으로 눈에 덮인 높고 어마어마한 산맥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 광경에 어느 정도로 놀랐는지, 또는 좌절했는지에 관해 루이스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존 로건 앨런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그 충격과 놀라움을 상상해보라. 막상 그 능선 꼭대기에 올라보니 자신들이 예상했던 커다란 강도, 남태평양까지 이어지는 탁 트인 벌판도 보이지 않았다.”
앨런의 말처럼 ‘희망의 지리학’이 ‘현실의 지리학’에 길을 내주었던 것이다. 루이스가 분수계의 꼭대기를 향해 그 마지막 발걸음을 옮김으로써, 로키산맥의 성격에 관한 수십 년의 온갖 이론은 단 한 사람의 일견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짧은 행군을 통해 컬럼비아강의 주요 지류까지 갈 수 있으리라는 루이스의 희망 역시 산산조각 났다. 루이스는 로키산맥의 일부인 비터루트산맥(Bitteroot Range)을 본 순간과 분수계의 서쪽 사면, 즉 루이지애나 바깥에 첫발을 내딛을 때의 기분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산을 내려갔다. 동쪽 사면에 비해 훨씬 가파른 길을 따라 4분의 3마일쯤 가서 개울을 발견한 그들은 또다시 10마일쯤 더 가서 캠프를 만들었다. 루이스는 3명의 대원만 데리고 인디언 지역으로 깊이 들어와 있었으며, 본대와는 사나흘쯤 행군해야 하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그가 아는 인디언 말은 몇 가지에 불과했다. 더욱이 인디언 1명이 겁을 먹고 쇼쇼니족에게 돌아가 이방인이 그 지역에 있다고 보고했을 것이었다. 루이스는 그날 하루 동안 원정 전체와 맞먹는 경험을 한 셈이었다. 그는 우선 푹 잘 필요가 있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최대한 많은 행운이 필요했다.
- 405~407p.
이제 겨울을 어디서 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식수, 풍부한 사냥감, 그리고 은신처였다. 클랫솝족은 남쪽 강변에 엘크가 많다고 알려주었다. 두 지휘관은 구슬과 잡동사니의 재고가 부족하고 치누크족이 비싼 값을 요구했기 때문에, 식량을 구입에만 의존해서는 겨울을 날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지속적으로 고기를 얻으려면 사냥을 해야 했다.
루이스는 소금을 염두에 두고 바다 쪽에 더 가까이 가고 싶어 했다. 물론 대원들도 모두 소금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클라크는 정색을 하고 반대하면서 소금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했다. 루이스가 해안 가까이에 머물고 싶어 했던 또 다른 이유는 혹시 겨울 동안 찾아올 무역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보급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일거에 해결될 것이었다. 클라크도 여기에는 동의했다. 또한 인디언이 남쪽 강변에 엘크가 많고 북쪽 강변에 사슴이 많다고 했으니 선택은 간단하지 않느냐는 것이 루이스의 말이었다. 이때 두 지휘관은 대원들을 결정 과정에 참여시켰다. 제시된 안은 첫째로 현재 장소에 그냥 머무르는 것, 둘째로 폭포가 있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셋째로 강을 건너 반대편을 조사해본 다음에 결정하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세 번째 안이 압도적 다수로(존 실즈 이병만 반대했다) 채택되었다.
남쪽 강변의 캠프 장소가 마땅치 않은 경우, 찬성자의 절반가량은 다시 폭포가 있는 데까지 거슬러 가자고 했고 나머지 절반은 그래도 그냥 하구에 머물자고 했다. 노예인 요크도 한 표를 당당히 행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클라크는 사카가위아의 별명을 언급하며 “제이니는 포타가 많은 곳에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적었다. 이것은 태평양 북서연안에서 이뤄진 사상 최초의 투표인 동시에 흑인 노예와 여성이 투표에 참여한 것으로도 미국 역사상 최초였다.
- 483~484p.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 당시, 13개 식민주로 이루어진 대서양 연안 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신흥국가 미국.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주인공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1803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으로부터 광대한 영토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에 사들인다. 루이지애나 매입 후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신뢰했던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를 서북쪽으로 파견하여 세인트루이스에서 로키산맥을 넘어 오리건까지 8천 마일에 이르는 장대한 역사적 탐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미연방의회는 제퍼슨의 이 야심만만한 도전에 강하게 반발하고, 설상가상으로 영국과의 전쟁 위험이 일촉즉발의 위기로 다가오는데…….
국내외적으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성공 가능성이 지극히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미지의 땅으로 루이스와 클라크의 탐사부대를 파견하는 제퍼슨. 그의 이 거대한 모험이 향후 미국과 세계 역사의 진로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초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만들어낸, 역사상 가장 놀라운 모험담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또한 그들의 업적이 오늘날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200년이라는 긴 시간의 경과, 게다가 우리의 역사도 아닌 미국사에서 일어났던 한 가지 에피소드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연 무슨 의미를 줄까?
첫째, 『불굴의 용기』는 그 자체로 손색없는 하나의 뛰어난 모험담이다. 30대 초반의 두 지휘관이 당시 최고의 군인들과 사냥꾼들을 불러 모아,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야생의 오지를 탐험한다는 이야기는 섀클턴의 이야기나 다른 어떤 모험 실화 못지않은 순수한 재미를 선사해준다. 남극이나 북극이 아니라 오늘날의 미국이 있는 바로 그 땅을 탐사한 것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은 선입견도 가질 수 있지만, 오로지 루이스와 클라크의 증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풍요로운 낙원 같은 루이지애나의 야생은 대단한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배를 타고 강을 따라가고, 높은 산맥을 건너며, 갖가지 신기한 야생동물이며 자연현상과 만나고, 호전적인 인디언 부족들과의 일전을 각오해야 하는 등, 어지간한 소설 못지않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둘째로 초창기의 미국사다. 비록 메리웨더 루이스의 생애와 원정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과 루이지애나 매입이라는 중대한 사건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루이지애나 매입은 미국의 국토를 단숨에 2배로 늘려놓았으며, 그곳에 포함된 막대한 자원은 이후 서부 개척시대의 열풍을 불러왔고, 급기야 미국의 영토가 태평양 지역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줌으로써, 사실상 오늘날의 초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마련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특히 이 책에 서술된 바, 제퍼슨과 루이스라는 당대 최고의 정치인과 지성인이 지닌 서부관을 보면, 미국의 이른바 프런티어 정신의 실체는 물론이고 이후 인디언을 탄압하면서까지 적극적인 팽창 정책에 나서게 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탁월한 리더십 지침서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리더십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상당히 흥미로운 사례로서 연구 가치가 있다. 직관적이고 다혈질이며 글쓰기와 자연 관찰에 유능했던 루이스와, 차분하고 인내심 많으며 행정 업무와 지도 작성에 탁월했던 클라크는 그 성격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재능에 있어서도 지극히 상보적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이 없었더라면 과연 원정이 성공했을지 차마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다. 물론 두 사람이 항상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은 아니지만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단점을 이해했기에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의 탁월한 리더십이 드러난 사례는 마리아스강 하구에서의 일이다. 인디언들조차 몰랐던 또 다른 강의 상류가 나타나자, 원정대는 과연 어느 쪽이 진짜 미주리강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대원들은 오른쪽이라고 생각하지만, 두 지휘관은 직접 답사를 다녀오고, 기존 정보를 토대로 추론을 거듭한 끝에 왼쪽이 진짜 미주리강이라고 정확하게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대원들이 여전히 오른쪽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왼쪽으로 가자는 두 지휘관의 지시에 기꺼이 따랐다는 점이다. 차라리 갔다가 잘못되어 되돌아올망정, 두 지휘관의 견해를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대원들이 루이스와 클라크에게 보낸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최악의 결과를 앞에 놓고서도 “계속 전진하기로” 한 것이라든지, 험한 산맥을 넘다가 곤경에 부딪치자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선뜻 “처음이자 마지막”인 후퇴를 지시한 것 역시, 두 지휘관이 지닌 탁월한 리더십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두 사람 역시 완벽한 인간까지는 아니어서 종종 실수도 하고, 자책도 하며, 부하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부과하기도 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디언들에게 거짓말도 한다. 하지만 그런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와 단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분명한 목표의식을 갖고 원정을 진행해나갔으며 놀라운 성공으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이 책은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원정대에서도 가장 특별한 인물이었던 요크와 사카가위아에 대한 것이 대표적이다. 가령 요크에 얽힌 이야기는 이후 60여 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종식되는 노예제도의 어두운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주인인 클라크를 따라 원정대의 일원이 되어 대륙 횡단에 성공한 것은 개인으로서는 영예인지 몰라도, 그 개인으로서는 지극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다녀온 뒤에 해방시켜 달라고 요구했다가 도리어 주인에게 배은망덕한 놈으로 매도당한 것을 보라.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탄생한 지금에 와서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바로 그 당시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인디언 여성 사카가위아의 이야기는 이 모험담에서도 가장 인상적이며, 또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본래 로키산맥 인근에 사는 쇼쇼니족 출신이었던 그녀는 미주리강 중류의 히다차족에게 사로잡혀 와서 결국 백인 교역상 샤르보노의 소유가 된다. 이후 샤르보노가 원정대에 통역으로 참가하게 되자, 사카가위아는 낳은 지 2개월밖에 안 되는 아들 폼프를 데리고 함께 원정대에 참여한다. 원정 도중에 그녀는 통역과 안내 말고도 종종 야생 채소를 구해오고, 갖가지 자질구레한 일을 담당하며 원정대의 일원으로서 크게 기여한다. 아울러 이 책에 묘사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생활상 역시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주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선언과 독립전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한 지 20여 년이 지난 뒤인 1803년, 미국은 오늘날의 영토 가운데 대서양 쪽의 3분의 1만을 차지한 신흥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취임 3년째를 맞이한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매입한다. 오늘날 미국 영토의 한가운데 3분의 1 가량을 차지하는 이 광대한 땅을 획득함으로써, 제퍼슨은 눈 깜짝할 사이에 국토를 두 배로 늘려 버린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당시 미국이나 프랑스는 물론이고 세계의 어느 누구도 이 루이지애나(지금의 루이지애나주와는 다름)라는 영토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워낙 방대한 영토에, 미국인들에겐 대부분 전인미답의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곳에 대한 조사 및 보고가 절실한 실정이었다. 이에 제퍼슨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개인비서 메리웨더 루이스 대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원정대를 조직하고, 의회를 설득해 대대적인 지원에 나선다.
원정대의 일차적인 목표는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완전수로(an All Water Route)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원정대는 당시 모피 무역의 전진기지 노릇을 하던 세인트루이스에서 출발해 대륙 중부를 관통하는 미주리강을 거슬러 북서쪽으로 올라간 다음, 로키산맥을 넘어 컬럼비아강을 따라 내려가 태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로 한다. 만약 미주리강 상류와 컬럼비아강 상류 사이를 연결해주는 가깝고도 편리한 육로가 있을 경우, 미국은 동서를 관통하는 사실상의 완전수로를 얻게 되어, 내륙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토대로 한 모피 무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막중한 책임을 맡은 루이스는 원정 준비에 분주한 와중에도, 한때 군 동료였으며 절친한 친구인 윌리엄 클라크에게 공동 지휘관직을 제안한다. 직관적이고 다혈질인 자신의 능력에 차분하면서 인내심 많은 친구의 능력이 합쳐지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루이스의 제안에 클라크가 흔쾌히 응낙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굳건한 우정의 예로 손꼽히며, 심지어 두 사람을 한 몸인 양 일컫는 ‘루이스 앤드 클라크’의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원정 준비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애초에 10여 명 규모로 잡았던 인원은 금세 수십 명 규모로 늘어났고, 클라크의 지위 결정을 둘러싼 민망한 문제도 있었다. 애초에 루이스는 클라크를 자신과 똑같은 대위 계급의 공동 지휘관으로 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료주의적 절차상의 문제로 인해 결국 루이스보다 아래인 중위 계급의 부지휘관으로 임명장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 사실을 대원 중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클라크를 자신과 마찬가지로 ‘캡틴’(군 계급으로는 ‘대위’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대장’이란 뜻이다)이라고 호칭하도록 한다. 두 사람의 이런 신뢰와 우정이야말로 원정이 거둔 성공의 기폭제가 되었다.
수 개월간의 지체 끝에 마침내 1803년 5월 14일, 세인트루이스를 출발해 원정을 시작했을 때의 인원은 뱃사람을 포함해 모두 54명, 그리고 5개월간의 여정 끝에 만단 족 마을에 도착해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4월에 원정을 재개했을 때, 대원들의 숫자는 모두 33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각지의 군부대에서 최고의 병사들을 선발하고, 숙련된 사냥꾼을 시기적절하게 특채했으며, 중도에 말썽을 일으킨 대원은 퇴출한 정예 중의 정예였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프랑스인 교역상과 함께 살고 있던 인디언 여성 사카가위아가 통역자로 동행했으며, 심지어 그녀가 낳은 2개월 된 아기까지도 원정대에 동반했다는 사실이다. 원정대의 또 다른 특이한 대원으로는 흑인 요크가 있었는데, 그는 클라크의 노예였다.
원정대는 이후 미주리강 상류의 강한 물살이며, 무시무시한 회색곰과의 싸움, 카누가 전복될 뻔한 위기, 그리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강의 분기점에서 자칫 길을 잘못 들 뻔한 사건 등, 갖가지 역경을 극복하며 서쪽으로 향한다.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의 등뼈에 해당하는 대륙분수계의 능선에 올랐을 때, 루이스는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 앞에서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만다. 일찍이 원정을 떠나기 전만 해도 제퍼슨과 루이스는 대륙분수계를 넘기만 하면 바로 컬럼비아강이 나올 것이라고, 그 강을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태평양이 금방 나타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능선에 오른 루이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거대한 산맥이었던 것이다. 바로 로키산맥이었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에 후세 사람들이 감히 ‘위대한’이라는 말을 붙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다. 본래의 계획이나 예상과는 완전히 어긋난 상황을 맞이하여, 대장인 루이스와 클라크는 숙고 끝에 ‘계속 전진하기로’ 결정한다. 앞으로 뭐가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태평양까지 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들은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로키산맥의 일부분인 비터루트산맥을 넘었고, 그토록 고대하던 컬럼비아강에 도달해서 배를 타고 하류로 향한다. 그리고 1805년 11월 20일, 무려 2년 반만의 여정 끝에 4천 마일을 주파하여 드디어 태평양에 도달한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륙 횡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원정대의 여정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태평양 연안에서 겨울을 보내고 다시 그 험준한 산맥을 넘어 문명 세계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루이스와 클라크는 대원 전체의 의견을 수렴하여(*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요크와 사카가위아도 당당히 한 표를 행사했는데, 흑인 노예와 인디언 여자까지 투표에 참가한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5년 흑인 투표권법이 제정됨으로써 흑인도 투표할 권리를 갖게 되었고, 1890년 와이오밍주가 처음으로 주 헌법으로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했으며, 1920년이 되어서야 연방 전체가 비로소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점을 감안할 때 비록 성숙한 정치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보다 자그마치 100여 년 전, 혹은 150여 년 전 여성과 흑인의 투표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겨울 숙영지를 건설하지만, 식량과 보급품의 부족으로 인한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심지어 이들은 인디언들에게 개를 사서 잡아먹는가 하면(*“대원들은 줄곧 그 지역 인디언들로부터 개를 사서 식용으로 썼지만, 클라크는 원정대에서 유일하게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14일, 클라크는 오리 몇 마리를 잡아 무려 3주일 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기운을 차렸다.” -본문 464쪽 중에서), 필요한 경우에는 장작이나 카누를 도둑질하기까지 한다. 원정용으로 마련한 보급품 가운데 이미 95퍼센트를 써버린 상황에서, 이들은 하루속히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북서 해안의 춥고 습한 겨울을 보낸다.
드디어 봄이 오자 원정대는 태평양을 떠나 다시 귀로에 오르지만, 여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힘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식량과 보급품의 부족이었다. 원정대로선 선뜻 시인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사실 이들의 성공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인디언들의 호의적인 도움이었다. 물론 때로는 적대적인 행위를 하기도 했고, 곤란에 빠진 원정대의 처지를 이용해 이득을 챙기기도 했지만, 실제로 인디언들이 헐값에 식량과 말을 제공해주지 않았더라면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1년 전, 비터루트산맥을 넘으면서 단단히 고생했던 원정대였지만, 이번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이 너무 앞선 까닭인지 그만 대단한 실책을 범하고 만다. 늦봄이 될 때까지는 눈이 쌓여서 통행할 수 없다는 인디언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예정보다 며칠이나 일찍 서둘러 출발했다가 결국 얼마 못 가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에서 유일하게 ‘전진’ 아닌 ‘후퇴’를 감행한 때였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루이스는 후한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인디언 길잡이들을 여럿 고용해서, 1년 전에 비하면 무척이나 수월하게 산맥을 넘는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루이스는 또 한 가지 중대한 실책을 범하고 만다. 원정의 성과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욕심이 지나쳤던 나머지, 미처 탐사하지 못한 지역을 돌아보기 위해 원정대를 여러 조로 나누어 운영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가령 루이스와 9명의 대원들은 루이지애나의 북쪽 경계 확인을 위해 마리아스강을 따라 올라가고, 클라크와 10명의 대원들은 옐로스톤강을 타고 내려가고, 그 외에도 두세 개 조가 저마다의 임무를 맡아 흩어지기로 한 것이다. 이들에게 적대적인지 호의적인지 알 수도 없는 인디언들이 횡행하는 지역 한가운데서 병력을 나눈 루이스의 결정이야말로, 자칫하면 원정 전체를 물거품으로 만들 뻔한 위험천만한 오판이었다.
결국 루이스는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된 판단에 대해 크나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즉 루이지애나의 북쪽 경계가 북위 49도 아래에 있다는 낙심천만한 결과를 확인하고 발길을 돌리려던 즈음, 우연히 그 일대를 호령하는 블랙푸트족의 인디언 전사들과 마주쳐 시비가 붙었고, 결국 그중 몇 명을 살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루이스 일행은 다행히도 무사히 본대와 합류하여 원정을 성공으로 이끌지만, 블랙푸트족과 미국인 사이에 생겨난 숙원은 이후 오랫동안 이어지며, 인디언과 백인 양측 모두에게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금의환향한 루이스와 클라크, 그리고 대원들은 대단한 찬사와 함께 막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의 업적이 일반에 제대로 알려지기까지는 이후 8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야만 했다. 문제의 원인은 바로 이 원정의 가장 큰 수혜자인 루이스였다. 그가 원정 내내 소중히 간직하며 기록한 일지야말로 이들의 업적을 모두의 앞에 증명해줄 산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찌된 일인지 일지의 출간을 위한 작업에 소극적이었고, 그리하여 일지가 결국 출간되었을 무렵에는 이들의 발견이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시 발견된 다음이었거나, 또는 이들이 붙여준 강이나 산의 이름이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시 지어진 다음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루이스에게는 크나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의 후광에 도취된 그는 제퍼슨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준주 지사라는 중요한 관직에 임명되지만, 천생 군인 체질이었던 그에겐 행정가로서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게다가 융통성 없는 고지식함 때문에 친구보다는 적을 더 많이 만들어냈으며, 나아가 금전관리에 대한 무관심과 서투름이 원인이 되어 무의식중에 남발한 어음이 신용 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집안내력이라 할 수 있는 우울증까지 가세하여 그는 그만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생전에도 루이스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믿음직스러운 동료였던 클라크는 원정일지의 출간이라는 또 한 가지 남은 임무를 고스란히 떠맡는다. 세상을 떠난 친구만큼의 필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클라크는 타고난 성실성과 인내를 바탕으로 전문 문필가들의 도움을 받아 1814년에 일지의 초판을 출간한다. 루이스의 사후 5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루이스와 클라크의 업적도 세간에서 잊혀지고, 그 일지가 작성되었을 때만 해도 미지의 땅이었던 미국 서부에는 이미 개척자와 사냥꾼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된 다음이었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이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후 원정일지의 무삭제 완전판과 서한집 등의 자료가 새로운 편집을 통해 재출간되면서부터였다. 이전에는 단순히 북서지방에 대한 정찰 정도로만 여겨졌던 이들의 원정이야말로 오늘날에 와서는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자료의 보고임이 드러났던 것이다. 특히 원정대와 만났던 인디언 부족들이며, 자연 경관 가운데 상당수가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비록 단편적이라 하더라도 이들의 일지야말로 과거를 증언하는 소중한 기록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비운의 영웅 루이스로선 무려 100여 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업적에 걸맞은 보상을 받은 셈이었다.
내용 요약 - 미국과 세계 역사를 바꾼 토머스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매입과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선언과 독립전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한 지 20여 년이 지난 뒤인 1803년, 미국은 오늘날의 영토 가운데 대서양 쪽의 3분의 1만을 차지한 신흥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취임 3년째를 맞이한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매입한다. 오늘날 미국 영토의 한가운데 3분의 1 가량을 차지하는 이 광대한 땅을 획득함으로써, 제퍼슨은 눈 깜짝할 사이에 국토를 두 배로 늘려 버린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당시 미국이나 프랑스는 물론이고 세계의 어느 누구도 이 루이지애나(지금의 루이지애나주와는 다름)라는 영토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워낙 방대한 영토에, 미국인들에겐 대부분 전인미답의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곳에 대한 조사 및 보고가 절실한 실정이었다. 이에 제퍼슨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개인비서 메리웨더 루이스 대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원정대를 조직하고, 의회를 설득해 대대적인 지원에 나선다.
원정대의 일차적인 목표는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완전수로(an All Water Route)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원정대는 당시 모피 무역의 전진기지 노릇을 하던 세인트루이스에서 출발해 대륙 중부를 관통하는 미주리강을 거슬러 북서쪽으로 올라간 다음, 로키산맥을 넘어 컬럼비아강을 따라 내려가 태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로 한다. 만약 미주리강 상류와 컬럼비아강 상류 사이를 연결해주는 가깝고도 편리한 육로가 있을 경우, 미국은 동서를 관통하는 사실상의 완전수로를 얻게 되어, 내륙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토대로 한 모피 무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막중한 책임을 맡은 루이스는 원정 준비에 분주한 와중에도, 한때 군 동료였으며 절친한 친구인 윌리엄 클라크에게 공동 지휘관직을 제안한다. 직관적이고 다혈질인 자신의 능력에 차분하면서 인내심 많은 친구의 능력이 합쳐지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루이스의 제안에 클라크가 흔쾌히 응낙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굳건한 우정의 예로 손꼽히며, 심지어 두 사람을 한 몸인 양 일컫는 ‘루이스 앤드 클라크’의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원정 준비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애초에 10여 명 규모로 잡았던 인원은 금세 수십 명 규모로 늘어났고, 클라크의 지위 결정을 둘러싼 민망한 문제도 있었다. 애초에 루이스는 클라크를 자신과 똑같은 대위 계급의 공동 지휘관으로 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료주의적 절차상의 문제로 인해 결국 루이스보다 아래인 중위 계급의 부지휘관으로 임명장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 사실을 대원 중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클라크를 자신과 마찬가지로 ‘캡틴’(군 계급으로는 ‘대위’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대장’이란 뜻이다)이라고 호칭하도록 한다. 두 사람의 이런 신뢰와 우정이야말로 원정이 거둔 성공의 기폭제가 되었다.
수 개월간의 지체 끝에 마침내 1803년 5월 14일, 세인트루이스를 출발해 원정을 시작했을 때의 인원은 뱃사람을 포함해 모두 54명, 그리고 5개월간의 여정 끝에 만단 족 마을에 도착해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4월에 원정을 재개했을 때, 대원들의 숫자는 모두 33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각지의 군부대에서 최고의 병사들을 선발하고, 숙련된 사냥꾼을 시기적절하게 특채했으며, 중도에 말썽을 일으킨 대원은 퇴출한 정예 중의 정예였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프랑스인 교역상과 함께 살고 있던 인디언 여성 사카가위아가 통역자로 동행했으며, 심지어 그녀가 낳은 2개월 된 아기까지도 원정대에 동반했다는 사실이다. 원정대의 또 다른 특이한 대원으로는 흑인 요크가 있었는데, 그는 클라크의 노예였다.
원정대는 이후 미주리강 상류의 강한 물살이며, 무시무시한 회색곰과의 싸움, 카누가 전복될 뻔한 위기, 그리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강의 분기점에서 자칫 길을 잘못 들 뻔한 사건 등, 갖가지 역경을 극복하며 서쪽으로 향한다.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의 등뼈에 해당하는 대륙분수계의 능선에 올랐을 때, 루이스는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 앞에서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만다. 일찍이 원정을 떠나기 전만 해도 제퍼슨과 루이스는 대륙분수계를 넘기만 하면 바로 컬럼비아강이 나올 것이라고, 그 강을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태평양이 금방 나타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능선에 오른 루이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거대한 산맥이었던 것이다. 바로 로키산맥이었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에 후세 사람들이 감히 ‘위대한’이라는 말을 붙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다. 본래의 계획이나 예상과는 완전히 어긋난 상황을 맞이하여, 대장인 루이스와 클라크는 숙고 끝에 ‘계속 전진하기로’ 결정한다. 앞으로 뭐가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태평양까지 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들은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로키산맥의 일부분인 비터루트산맥을 넘었고, 그토록 고대하던 컬럼비아강에 도달해서 배를 타고 하류로 향한다. 그리고 1805년 11월 20일, 무려 2년 반만의 여정 끝에 4천 마일을 주파하여 드디어 태평양에 도달한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륙 횡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원정대의 여정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태평양 연안에서 겨울을 보내고 다시 그 험준한 산맥을 넘어 문명 세계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루이스와 클라크는 대원 전체의 의견을 수렴하여(*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요크와 사카가위아도 당당히 한 표를 행사했는데, 흑인 노예와 인디언 여자까지 투표에 참가한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5년 흑인 투표권법이 제정됨으로써 흑인도 투표할 권리를 갖게 되었고, 1890년 와이오밍주가 처음으로 주 헌법으로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했으며, 1920년이 되어서야 연방 전체가 비로소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점을 감안할 때 비록 성숙한 정치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보다 자그마치 100여 년 전, 혹은 150여 년 전 여성과 흑인의 투표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겨울 숙영지를 건설하지만, 식량과 보급품의 부족으로 인한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심지어 이들은 인디언들에게 개를 사서 잡아먹는가 하면(*“대원들은 줄곧 그 지역 인디언들로부터 개를 사서 식용으로 썼지만, 클라크는 원정대에서 유일하게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14일, 클라크는 오리 몇 마리를 잡아 무려 3주일 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기운을 차렸다.” -본문 464쪽 중에서), 필요한 경우에는 장작이나 카누를 도둑질하기까지 한다. 원정용으로 마련한 보급품 가운데 이미 95퍼센트를 써버린 상황에서, 이들은 하루속히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북서 해안의 춥고 습한 겨울을 보낸다.
드디어 봄이 오자 원정대는 태평양을 떠나 다시 귀로에 오르지만, 여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힘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식량과 보급품의 부족이었다. 원정대로선 선뜻 시인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사실 이들의 성공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인디언들의 호의적인 도움이었다. 물론 때로는 적대적인 행위를 하기도 했고, 곤란에 빠진 원정대의 처지를 이용해 이득을 챙기기도 했지만, 실제로 인디언들이 헐값에 식량과 말을 제공해주지 않았더라면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1년 전, 비터루트산맥을 넘으면서 단단히 고생했던 원정대였지만, 이번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이 너무 앞선 까닭인지 그만 대단한 실책을 범하고 만다. 늦봄이 될 때까지는 눈이 쌓여서 통행할 수 없다는 인디언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예정보다 며칠이나 일찍 서둘러 출발했다가 결국 얼마 못 가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에서 유일하게 ‘전진’ 아닌 ‘후퇴’를 감행한 때였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루이스는 후한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인디언 길잡이들을 여럿 고용해서, 1년 전에 비하면 무척이나 수월하게 산맥을 넘는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루이스는 또 한 가지 중대한 실책을 범하고 만다. 원정의 성과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욕심이 지나쳤던 나머지, 미처 탐사하지 못한 지역을 돌아보기 위해 원정대를 여러 조로 나누어 운영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가령 루이스와 9명의 대원들은 루이지애나의 북쪽 경계 확인을 위해 마리아스강을 따라 올라가고, 클라크와 10명의 대원들은 옐로스톤강을 타고 내려가고, 그 외에도 두세 개 조가 저마다의 임무를 맡아 흩어지기로 한 것이다. 이들에게 적대적인지 호의적인지 알 수도 없는 인디언들이 횡행하는 지역 한가운데서 병력을 나눈 루이스의 결정이야말로, 자칫하면 원정 전체를 물거품으로 만들 뻔한 위험천만한 오판이었다.
결국 루이스는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된 판단에 대해 크나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즉 루이지애나의 북쪽 경계가 북위 49도 아래에 있다는 낙심천만한 결과를 확인하고 발길을 돌리려던 즈음, 우연히 그 일대를 호령하는 블랙푸트족의 인디언 전사들과 마주쳐 시비가 붙었고, 결국 그중 몇 명을 살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루이스 일행은 다행히도 무사히 본대와 합류하여 원정을 성공으로 이끌지만, 블랙푸트족과 미국인 사이에 생겨난 숙원은 이후 오랫동안 이어지며, 인디언과 백인 양측 모두에게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금의환향한 루이스와 클라크, 그리고 대원들은 대단한 찬사와 함께 막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의 업적이 일반에 제대로 알려지기까지는 이후 8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야만 했다. 문제의 원인은 바로 이 원정의 가장 큰 수혜자인 루이스였다. 그가 원정 내내 소중히 간직하며 기록한 일지야말로 이들의 업적을 모두의 앞에 증명해줄 산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찌된 일인지 일지의 출간을 위한 작업에 소극적이었고, 그리하여 일지가 결국 출간되었을 무렵에는 이들의 발견이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시 발견된 다음이었거나, 또는 이들이 붙여준 강이나 산의 이름이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시 지어진 다음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루이스에게는 크나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의 후광에 도취된 그는 제퍼슨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준주 지사라는 중요한 관직에 임명되지만, 천생 군인 체질이었던 그에겐 행정가로서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게다가 융통성 없는 고지식함 때문에 친구보다는 적을 더 많이 만들어냈으며, 나아가 금전관리에 대한 무관심과 서투름이 원인이 되어 무의식중에 남발한 어음이 신용 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집안내력이라 할 수 있는 우울증까지 가세하여 그는 그만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생전에도 루이스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믿음직스러운 동료였던 클라크는 원정일지의 출간이라는 또 한 가지 남은 임무를 고스란히 떠맡는다. 세상을 떠난 친구만큼의 필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클라크는 타고난 성실성과 인내를 바탕으로 전문 문필가들의 도움을 받아 1814년에 일지의 초판을 출간한다. 루이스의 사후 5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루이스와 클라크의 업적도 세간에서 잊혀지고, 그 일지가 작성되었을 때만 해도 미지의 땅이었던 미국 서부에는 이미 개척자와 사냥꾼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된 다음이었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이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후 원정일지의 무삭제 완전판과 서한집 등의 자료가 새로운 편집을 통해 재출간되면서부터였다. 이전에는 단순히 북서지방에 대한 정찰 정도로만 여겨졌던 이들의 원정이야말로 오늘날에 와서는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자료의 보고임이 드러났던 것이다. 특히 원정대와 만났던 인디언 부족들이며, 자연 경관 가운데 상당수가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비록 단편적이라 하더라도 이들의 일지야말로 과거를 증언하는 소중한 기록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비운의 영웅 루이스로선 무려 100여 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업적에 걸맞은 보상을 받은 셈이었다.
본문 중에서
제퍼슨은 항공여행에서 무려 한 세대 정도를 앞선 인물이었고, 육상여행에서는 마력 이외에 증기력을 이용해 수레를 움직인다는 발상에 매료되었다. 1802년의 예언이 이를 증명한다.
“수레를 움직일 때 증기처럼 강력한 동력원을 도입하는 것은 인간의 지위에 큰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비록 동력원이 다르긴 하지만 제퍼슨은 무려 100년 앞서 자동차를 생각한 셈이었다. 아쉽게도 그는 기차도 구경하지 못하고 죽었다. 수상여행에 대해서만큼은 제퍼슨도 효율을 증대하는 방법을 고안하지 못했다. 19세기 초, 육중하거나 양이 많은 물품은 모조리 배로 운송됐기 때문에 1801년 당시의 미국인은 항상 물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운하를 만든 다음, 갑문을 이용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급류를 우회하는 방법에 대한 계획이 가득 차 있었다. 제퍼슨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강을 넓히고 운하를 파고 도로를 닦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라고 썼다. 문명이 탄생한 이래 그때까지 운송 및 교통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미국인은 셰익스피어를 읽고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을 배출한 사회에 살고 있었지만, 기술은 사실상 고대 그리스에 비해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 물론 더 우수한 무기, 뛰어난 지리학적 지식, 그리고 다른 몇 가지 면에서 고대인을 능가했으나 육상에서든 수상에서든 화물 및 사람을 운반하는 면에서든 고대보다 더 빠르다고 할 수 없었다. 헨리 애덤스는 당시의 정신적 풍조를 이렇게 묘사했다.
“가령 립 밴 윙클이 1800년대 들어 오랜 잠에서 깨어날지라도 한때 조지 왕의 초상화가 걸린 자리에 워싱턴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에게 낯선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60년 뒤, 그러니까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선서를 했을 때 미국인이 막대한 양의 물품을 움직일 수 있는 시간당 거리는 육상(철도의 경우 시속 25마일)에서든 수상(상류행 증기선의 경우 시속 10마일)에서든 1801년에 비해 크게 늘어나 있었다. 운송에서 그토록 짧은 시간에 비약적인 발전이 일어난 것은 그야말로 예기치 못했던 혁명이었다. 제퍼슨 시대에 미시시피강에서 워싱턴 D.C.까지 정보를 전달하려면 무려 6주일이 걸렸으나 링컨의 시대에는 같은 거리임에도 전신을 통해 거의 즉각적으로 전달됐다.
결국 시간과 거리, 산과 강의 의미는 토머스 제퍼슨의 시대와 에이브러햄 링컨의 시대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퍼슨이 북아메리카를 생각할 때 그의 머릿속을 차지한 것은 강이었다. 가까운 미래에 그는 뉴올리언스를 미국의 영토로 흡수할 계획이었고, 이를 통해 서부가 미국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 다음에 그는 대륙의 3분의 2나 되는 서부를 통과하는 완전수로를 찾을 계획이었다.
― 73~75p.
1801년 들어 제퍼슨은 프랑스(나폴레옹)와 에스파냐(나폴레옹의 형)간의 비밀협약으로 루이지애나가 에스파냐에서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재할양이었다. 제퍼슨은 크게 놀랐다. 에스파냐가 그곳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에는 미국도 그곳에 대한 주권을 주장할 수 있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라면 얘기가 달랐다. 제퍼슨은 종종 대책 없는 프랑스 애호가로 불렸지만 이 문제에서만큼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프랑스가 뉴올리언스를 소유하게 되는 날은 그 나라를 최악의 상태에 영원히 속박시키는 형이 선고되는 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영국 함대나 그 나라와 화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 측에 자신의 결심을 알렸다. 동시에 나폴레옹에게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양도함으로써 일찍이 동맹국이었던 두 나라의 전쟁 가능성을 뿌리 뽑자고 제안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제퍼슨은 프랑스를 바다에서 완파하겠다고 장담했으며, 루이지애나에 프랑스군을 상륙시키려는 시도를 한다면 이를 전쟁의 구실로 삼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말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원정부대는 이미 산토도밍고에서 참패를 당하고 있었던 터라 그 식민지를 재정복할 수 없음은 물론 뉴올리언스로 병력을 보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여차하면 영국과 미국이 연합해 프랑스의 해군과 상선을 격침시킬 것이 뻔했다.
고심하던 나폴레옹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그의 천성을 발휘해 그 땅을 비싼 가격에 팔아치울 궁리를 했다. 그 와중에 그때까지 뉴올리언스를 통제하던 에스파냐인은 미국인의 기탁권을 철회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고 미국인은 여전히 뗏목이나 평저선을 이용해 선박에서 항구까지 짐을 직접 나르거나 요금을 지불했다. 어쨌든 루이지애나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나폴레옹뿐이었다. 제퍼슨은 파리 주재 미국 공사인 로버트 리빙스턴(Robert Livingston)에게 지시해 미시시피강 하류에서 항구로 사용할 수 있는 토지를 얻을 수 있도록 했고, 만약 그 일에 실패하면 기탁권을 취소하지 않겠다는 보장이라도 받으라고 지시했다.
제퍼슨은 리빙스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제임스 먼로를 전권공사로 삼아 파리로 보내며 뉴올리언스를 200만 달러에 구입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공화당 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던 제퍼슨은 뉴올리언스를 구입하기 위해 최대 1,000만 달러까지 의회에 승인을 요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분명 합헌적인 일이었다. 그것 말고는 통상을 증대시키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이 미국에 뉴올리언스뿐 아니라 루이지애나 전체를 팔아치울 의향이 있음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 103~105p.
“미주리지역의 운명은 향후 미국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연방의 국경선 밖에 놓인 지역으로는 유일하게 광대한 영토이며 미국 국민이 정착할 최초의 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퍼슨이 최우선으로 삼은 것은 태평양까지의 완전수로를 찾는 것이었다. 이 원정은 갤러틴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에 제퍼슨은 본래의 목표를 상기시켰다.
“이 원정의 최대 목표는 미주리지역의 넓이와 그 비옥함이 많은 인구를 감당할 수 있는지, 즉 오하이오에 상응하는 영토와 마찬가지인지를 확인하는 데 있소.”
그는 루이스에게 토양은 물론 그 지역에 많은 나무 종류를 알아내고 연평균 강수량과 연중 기온차를 추정한 다음 농부들에게 중요한 다른 요인들을 종합해 그 비옥도를 판단하도록 지시했다. 제퍼슨은 갤러틴이 제안한 것을 상당수 채택했지만, 그가 최고통수권자로서 루이스에게 준 지시 내역 최종판에는 탐사와 상업을 농업보다 우선시했다.
“자네의 임무는 미주리강, 그리고 그와 유사한 주요 하천을 탐사해 그 경로는 물론 태평양으로 흐르는 다른 물길과 연결되는지 확인하는 데 있네. 나아가 컬럼비아, 오리건, 콜로라도 또는 다른 강이 상업적 목적을 위한 가장 직접적이고 실현가능한 대륙 횡단 수상연결망을 제공하는지 판별해야 하네.”
구체적으로 제퍼슨은 영국인 교역상들이 미주리강 인근 부족과 교역하기 위해 캐나다에서 내려오는 경로, 그리고 그들의 교역 방법과 관습을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또한 현재 영국인이 주도하고 있는 모피 교역을 어떻게 하면 미주리강의 경로를 이용해 미국인이 독차지할 수 있을지에 관해 제안하도록 했다. 상업에서는 정확한 지도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제퍼슨은 이렇게 지시했다.
“미주리강 하구에서부터 위도와 경도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강의 하구, 급류, 섬, 그리고 다른 지역과 대상 중에서도 자연적으로 두드러지고 지속적인 특징을 지닌 것을 기록하게.”
제퍼슨은 추측한 것과 관찰한 것을 명료하게 기록하도록 지시하면서 여러 개의 사본을 만들어 두되, 그중 하나는 일반 종이보다 습기에 더 잘 견디는 자작나무 종이를 쓰라고 했다.
모피 교역을 하려면 인디언 부족에 관한 지식이 꼭 필요했다. 제퍼슨은 각 부족의 이름과 숫자, 영토의 범위, 다른 부족과의 관계, 언어·전통·유적·주업(농업, 어업, 사냥, 약탈 등 먹고사는 기반), 그리고 그런 활동에 사용하는 기구, 식량, 의복, 주택, 주요 질병과 그 치료법, 법률과 관습을 알아오라고 했다. 그리고 목록의 마지막에 그들이 필요로 하거나 갖추고자 하는 교역 품목과 원하는 정도를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 138~139p.
뉴잉글랜드의 연방당원들은 이 매입에 반대함으로써 역사에서 잘못된 편에 서는 실수를 저질렀다. 어떤 사람은 이 매입을 가리켜 ‘엄청난 저주’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매입이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 연방을 전복시킬 위협이 될 것’이라고 했다.
루이스의 보충 교육을 담당했던 필라델피아의 캐스파 위스타는 이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제퍼슨에게 다음과 같은 축하 편지를 썼다.
“각하께서 우리나라를 위해 수행한 매우 훌륭한 매입입니다. 비록 이 나라에는 그 할양의 범위나 대가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독립선언 이래 벌어진 거래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것으로, 독립선언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거나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매입의 즉각적인 효과 중 하나는 루이스가 훗날 대륙분수계 동편에서 만난 인디언 부족과 그의 관계에 끼친 영향이었다. 이제 인디언들은 미국 영토에 거주하는 셈이었다. 루이스는 그 사실을 인디언들에게 알려줘야 할 책임을 지니게 되었다. 제퍼슨은 루이스가 그들을 미국의 교역망 안으로 끌어들이길 원했고, 루이스는 양측 사이에 평화를 조성하는 동시에 만단족 마을 주위의 영국인에게 이제 그들이 외국에 거주하는 셈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루이지애나의 경계가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아무도 몰랐다.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를 매각하면서 그 영토를 ‘현재 에스파냐의 손에 있는 것과 똑같은 범위, 과거 프랑스 손에 있던 것과 똑같은 범위’라고만 규정했다. 당시의 일반적인 믿음에 따르면 루이지애나는 미시시피강 유역의 서쪽 절반으로 이루어진 땅이었다. 다시 말해 남으로는 멕시코만, 북으로는 미주리강의 북쪽 지류, 동으로는 미시시피강, 서로는 대륙분수계까지 달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지역이 북쪽의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알지 못했기에 매입에 덧붙여 북부의 영토를 더 많이 확보하고 싶어 했던 제퍼슨은 곧바로 루이스에게 북부 지류도 탐사하도록 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공식 지시 내역에서는 그 지역의 남부 지류만 탐사하도록 강조했었다.
제퍼슨은 토지를 원했다. 또한 제국을 원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고, 그중에서도 최우선은 루이지애나의 국경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다. 외교사가인 토머스 메이틀랜드 마셜(Thomas Maitland Marshall)은 그에 대해 훌륭하게 서술했다.
“애초에는 그 매입이 미시시피강 유역의 서쪽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됐지만, 제퍼슨의 개념은 점차 확장됐고 1808년에는 플로리다 서부, 텍사스, 오리건지역을 포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각은 이후 반세기 가까이 미국 외교의 상당 부분에서 근거로 작용했다.”
- 150~152p.
이제는 그 산길의 꼭대기로 올라가 아이다호와 광대한 북서제국을 바라본 최초의 미국인이 탄생할 때가 되었다. 루이스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분계능선의 꼭대기로 향했고, 그곳에서 나는 우리의 서편에 꼭대기가 부분적으로 눈에 덮인 높고 어마어마한 산맥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 광경에 어느 정도로 놀랐는지, 또는 좌절했는지에 관해 루이스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존 로건 앨런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그 충격과 놀라움을 상상해보라. 막상 그 능선 꼭대기에 올라보니 자신들이 예상했던 커다란 강도, 남태평양까지 이어지는 탁 트인 벌판도 보이지 않았다.”
앨런의 말처럼 ‘희망의 지리학’이 ‘현실의 지리학’에 길을 내주었던 것이다. 루이스가 분수계의 꼭대기를 향해 그 마지막 발걸음을 옮김으로써, 로키산맥의 성격에 관한 수십 년의 온갖 이론은 단 한 사람의 일견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짧은 행군을 통해 컬럼비아강의 주요 지류까지 갈 수 있으리라는 루이스의 희망 역시 산산조각 났다. 루이스는 로키산맥의 일부인 비터루트산맥(Bitteroot Range)을 본 순간과 분수계의 서쪽 사면, 즉 루이지애나 바깥에 첫발을 내딛을 때의 기분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산을 내려갔다. 동쪽 사면에 비해 훨씬 가파른 길을 따라 4분의 3마일쯤 가서 개울을 발견한 그들은 또다시 10마일쯤 더 가서 캠프를 만들었다. 루이스는 3명의 대원만 데리고 인디언 지역으로 깊이 들어와 있었으며, 본대와는 사나흘쯤 행군해야 하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그가 아는 인디언 말은 몇 가지에 불과했다. 더욱이 인디언 1명이 겁을 먹고 쇼쇼니족에게 돌아가 이방인이 그 지역에 있다고 보고했을 것이었다. 루이스는 그날 하루 동안 원정 전체와 맞먹는 경험을 한 셈이었다. 그는 우선 푹 잘 필요가 있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최대한 많은 행운이 필요했다.
- 405~407p.
이제 겨울을 어디서 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식수, 풍부한 사냥감, 그리고 은신처였다. 클랫솝족은 남쪽 강변에 엘크가 많다고 알려주었다. 두 지휘관은 구슬과 잡동사니의 재고가 부족하고 치누크족이 비싼 값을 요구했기 때문에, 식량을 구입에만 의존해서는 겨울을 날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지속적으로 고기를 얻으려면 사냥을 해야 했다.
루이스는 소금을 염두에 두고 바다 쪽에 더 가까이 가고 싶어 했다. 물론 대원들도 모두 소금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클라크는 정색을 하고 반대하면서 소금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했다. 루이스가 해안 가까이에 머물고 싶어 했던 또 다른 이유는 혹시 겨울 동안 찾아올 무역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보급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일거에 해결될 것이었다. 클라크도 여기에는 동의했다. 또한 인디언이 남쪽 강변에 엘크가 많고 북쪽 강변에 사슴이 많다고 했으니 선택은 간단하지 않느냐는 것이 루이스의 말이었다. 이때 두 지휘관은 대원들을 결정 과정에 참여시켰다. 제시된 안은 첫째로 현재 장소에 그냥 머무르는 것, 둘째로 폭포가 있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셋째로 강을 건너 반대편을 조사해본 다음에 결정하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세 번째 안이 압도적 다수로(존 실즈 이병만 반대했다) 채택되었다.
남쪽 강변의 캠프 장소가 마땅치 않은 경우, 찬성자의 절반가량은 다시 폭포가 있는 데까지 거슬러 가자고 했고 나머지 절반은 그래도 그냥 하구에 머물자고 했다. 노예인 요크도 한 표를 당당히 행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클라크는 사카가위아의 별명을 언급하며 “제이니는 포타가 많은 곳에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적었다. 이것은 태평양 북서연안에서 이뤄진 사상 최초의 투표인 동시에 흑인 노예와 여성이 투표에 참여한 것으로도 미국 역사상 최초였다.
- 483~48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