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뉴먼츠 맨 (히틀러의 손에서 인류의 걸작을 구해낸 영웅들 | 원제 The Monuments Men-Allied Heroes, Nazi Thieves, and the Greatest T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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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 로버트 M. 에드셀
• 옮긴이 : 박중서
• 출판사 : 뜨인돌
• 가격 : 33,000원
• 책꼴/쪽수 :
160x230, 624쪽
• 펴낸날 : 2012-02-06
• ISBN : 9788958073499
• 십진분류 : 역사 > 역사 (900)
• 도서상태 : 정상
• 추천기관 :
서울시교육청도서관 추천도서
저자소개
지은이 : 로버트 M. 에드셀
1990년대 말 이탈리아 피렌체에 거주할 때 문득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유럽의 훌륭한 기념물과 미술품은 어떻게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이겨내고 살아남았을까?’ 이것이 그가 모뉴먼츠 맨, 즉 기념물 전담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였다. 그때부터 비공개 문서들을 입수해가며 기념물 전담반을 연구하는 데 긴 세월을 바쳤다. ‘기념물 전담반 미술품 보전 재단The Monuments Men Foundation for the Preservation of Arts'을 설립했고 이 단체는 2007년에‘국가 인문학 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나치의 약탈과 기념물 전담반의 활동을 사진으로 담은 『Rescuing Da Vinci』가 있다.
옮긴이 : 박중서
출판 기획 및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중서는 한국저작권센터(KCC)에서 에이전트로 일했으며, ‘책에 대한 책’ 시리즈를 기획했다. 세상에 숨어 있는 의미와 가치를 찾아 책으로 펴내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 찬 옮긴이의 역서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가 있다.
목차
역자의 말
저자의 말
Section 1 임무
1장 독일을 벗어나
2장 히틀러의 꿈
3장 전투 준비
4장 재미없고 공허한 세상
5장 레프티스 마그나
6장 최초의 전투
7장 몬테카시노
8장 기념물, 예술품, 기록물 전담반
9장 임무
Section 2 유럽 북부
10장 존경을 받는다는 것
11장 전장에서의 회의
12장 미켈란젤로의 <성모자>
13장 대성당과 걸작
14장 얀 반 에이크의 <어린 양에 대한 경배>
15장 제임스 로라이머, 루브르를 방문하다
16장 독일 진입
17장 현장 조사
18장 태피스트리
19장 크리스마스 소원
20장 라 글레즈의 성모
21장 열차
22장 벌지 전투
23장 샴페인
Section3 독일
24장 미군 소속의 독일계 유대인
25장 우리는 전투를 이겨냈다
26장 새 기념물 전담반원
27장 지도를 살피는 조지 스타우트
28장 미술품의 이동
29장 두 가지 전환점
30장 히틀러의 네로 명령
31장 제1군, 라인 강을 건너다
32장 보물지도
33장 짜증
34장 산속으로
35장 상실
36장 기억할 만한 한 주
Section4 진공
37장 소금
38장 공포
39장 지방장관
40장 무너진 광산
41장 마지막 생일 파티
42장 계획
43장 올가미
44장 발견
45장 올가미 조여지다
46장 질주
47장 마지막 날들
48장 통역자
49장 음악 소리
50장 그 길의 끝
Section 5 전쟁이 끝나고
51장 알타우세의 진실
52장 대피
53장 귀향
54장 문명의 영웅들
기타 등장인물 567
감사의 말 572
후주 577
참고문헌 597
편집자 추천글
모뉴먼츠 맨
기념물 전담반이라고 번역했다.
1943년부터 1951년까지 활동한 소규모 연합군 부대를 가리킨다.
교회나 박물관 등 중요한 기념물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쟁 중에 강탈당하거나 실종된 예술품의 행방을 찾는 등
세계적 문화재를 수호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 모뉴먼츠 맨, 위기에 처한 예술품을 구해낸 제2차 세계대전의 숨은 영웅들
『모뉴먼츠 맨』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예술품을 구하고자 분투한 소규모 부대의 분투를 담은 역사 다큐멘터리다. 저자 로버트 M. 에드셀은‘뛰어난 미술작품들은 어떻게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았는가?’라는 질문 하나를 잡고 수년간 치밀한 조사와 집필 끝에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기념물 전담반은 세계 각국에서 모인 350여 명의 남녀로 구성되었지만 이 책에서는 특히 중요한 행적을 보인 요원 8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1944년 6월부터 1945년 9월까지 그 긴박했던 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 역사상 최초의 예술품 보존 부대, 나치의 욕망과 싸우다
군대가 문화적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따로 부대를 편성한다는 것은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 부대에 자원입대한 최초의 대원들 60여 명은 대개 중년으로, 박물관 관장, 큐레이터, 건축가 등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는 이들이었다. 초기 임무는 중요한 건축물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었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강탈당하거나 실종된 예술작품의 행방을 찾는 쪽으로 성격이 변했다. 특히 유럽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히틀러와 나치가 문화유물을 무려 500만 점이나 압수해 제3제국 영토로 이송했기 때문에 이를 추적하는 데 애를 먹었다. 히틀러가 미술품 약탈에 이토록 집착한 까닭은 고향인 린츠에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미술관을 세우고 걸작들로 그곳을 채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나치는 평화 협정의 담보물로 미술품을 압수하기도 했고, 때로는 특별한 이유 없이 강탈했다.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은 축재를 위해 비열한 약탈을 일삼았고 병사들은 액자에서 빼낸 그림들을 크기대로 분류하여 아무렇게나 상자에 넣은 뒤 곳곳에 마련한 보관소에 수만 점씩 은닉했다.
약탈 미술품 보관소는 1,000개 이상, 한 군데의 압수 건수만 2만 건이 넘어
히틀러가 린츠의 박물관으로 보내려고 한 국보급 문화재들 대부분은 오스트리아 알타우세 광산의 은닉처에 보관되었다. 알타우세 광산은 기념물 전담반이 발견한 가장 중요한 보관소 두 곳 중에 하나로, 소금 광산이었던 자리에 거대한 방들을 마련하여 어마어마한 수의 예술품을 은닉했다. 회화만 1,687점 이상 발견됐고, 얀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같은 걸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악할 만한 사실은 나치가 이 거대한 광산을 여차하면 파괴할 작정으로 폭탄까지 설치해놓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보관소 중 또 다른 하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다. 이곳에서는 로트실트 가문의 보석 컬렉션, 그리고 세계적인 수집가 피에르 다비트 바일의 소유였던 1,000개의 은 세공품 등 나치가 압수한 보물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다행히 나치는 압수 내역을 상세히 기록했는데, 압수 건수만 2만1,000건이 넘었다.
연합군이 독일 남부에서 발견한 약탈 미술품 보관소는 총 1,000개 이상이었다. 여기에는 회화 작품을 비롯해 교회 종, 스테인드글라스, 종교 관련 물품, 필사본, 와인, 금, 다이아몬드, 심지어 곤충 표본까지 있었다. 이 물건들을 포장하고, 분류 목록을 작성하고, 기록을 남기고, 원래 소유주가 있는 국가로 돌려보내는 데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수십만 점에 달하는 중요한 미술품, 서적 등은 아직까지도 행방이 묘연하다.
독일군의 양가죽 코트와 밧줄, 도르래로 인류의 걸작을 구하다
기념물 전담반이 알타우세에서 발견한 걸작 중에는 나치가 벨기에 브뤼헤에서 약탈해온 미켈란젤로의 <성聖모자> 상도 있었다. 이 작품은 16세기에 제작되어 미켈란젤로 생전에 이탈리아 밖으로 나간 유일한 작품이다. <성모자> 상은 전에도 약탈당한 역사가 있다. 1794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가 벨기에를 정복하고 약탈했다가 그로부터 20년 뒤에 나폴레옹이 패배한 다음에야 벨기에로 돌아왔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간 이 작품은 기념물 전담반의 뛰어난 요원들 중 하나인 조지 스타우트의 지휘 아래 다시 빛을 보았다. 과정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일단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얄타 회담이 타결되어 언제 알타우세가 소련의 점령지역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스타우트는 수많은 작품들 중 가장 먼저 옮겨야 할 작품들의 순위를 정했다. <성모자> 상은 단연코 첫 번째가 되어야 할 작품이었다. 요원들은 전리품으로 얻은 독일군의 양가죽 코트로 <성모자> 상을 둘둘 싸고 특별히 고안한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하여 손수레 광차에 올리고 좁은 선로에 실어 보냈다. 15세기 플랑드르 회화의 명작으로 불리는 <겐트 제단화>도 까다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은 접히는 몇 개의 폭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각각의 패널을 조심스럽게 나무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작품을 옮길 트럭 바닥에 가스 공격에 대비해 마련한 방수용지를 깔고, 그 위에 펠트 천을 한 겹, 그리고 커튼으로 만든 베개 모양의 완충재를 깔았다. 그 위에 나무 상자를 올려놓고 균형을 잡기 위해 다른 나무 상자를 빈 공간에 끼워 넣었다. 트럭에 작품을 실은 다음에는 펠트 천과 방수용지를 그 위에 또 깔고, 폭격으로 상황이 나빠진 도로 위에서 덜컹거리지 않도록 밧줄로 단단히 동여맸다. <성모자> 상과 <겐트 제단화> 포장에만 꼬박 하루가 걸렸고, 이 작품을 실은 트럭 뒤에 반궤도 차량 두 대가 따르는 가운데 150마일이나 달렸다.
■ 파괴와 보존, 승리와 패배,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에서 고뇌하다
책의 곳곳에서 아군과 적군을 막론하고 승리를 위해 파괴를 서슴지 않는 비인간성에 괴로워하는 이들의 고백이 드러난다. 또한 파괴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군인들과 명분 없는 파괴를 비난하는 여론의 대립이 엿보이기도 한다.
“만약 유명한 건물을 파괴하느냐 우리 병사들을 희생시키느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우리 병사의 생명이 월등히 중요하므로 그 건물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 본문 88페이지
아이젠하워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예술품 파괴는 정치적/군사적 고민뿐 아니라 단순한 무지 혹은 증오심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여러 성의 커다란 방마다 시커멓게 검댕이 묻어 있었는데 이는 독일인이든 미국인이든 구식 벽난로 쓰는 법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었다. 미군 병사 4명이 중요한 회화를 인근 마을의 젊은 여성들에게 애정 표시로 선물하기도 했다. 당피에르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패널화인 앵그르의 <황금시대> 바로 앞에 칵테일 바를 설치하기도 했다. - 본문 225-226페이지
혼란의 시기에 사람들은 한 끼 식사, 혹은 안전한 통행을 위해 중요한 미술품을 장사치들에게 넘기기도 했고, 나치가 만든 터무니없는 평화조약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가보를 빼앗기기도 했다. 전쟁의 편의를 위해 역사적 건축물을 함부로 파괴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기념물 전담반에게는 파괴를 저지할 수 있을 만큼의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출입금지판조차 부족하여 중요한 건축물에 표시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대원들이 타고 다닐 차량도, 파괴 정도를 기록할 사진기도, 타자기도 없었고 대원들끼리 업무 공조도 되지 않아 힘겹게 도착한 파괴현장에서 이미 동료 대원이 남기고 간 조사 흔적을 발견하고 허탈해지기 일쑤였다. 기념물 전담반은 영웅이긴 하였으나 독일인에 대한 증오(“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을 몽땅 찾아내는 일은 그런 광신도들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죽어버린 다음에야 끝날지도 몰라.” - 본문 319쪽), 전쟁의 부조리함(“독일군을 굴복시키기 위해 연합군이 행한 잔인무도한 파괴는 생각하기조차 고통스러웠다.”-본문 349쪽)으로 인해 고통 받는, 지극히 인간적인 영웅이었다.
■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무너졌지만 덕수궁은 살아남았다
1944년 이탈리아 볼투르노 산지에서는 기념물 전담반의 활동에 영향을 끼치고, 훗날 덕수궁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폭격이다. 독일군과 연합군이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그 지역에서 연합군은 산꼭대기에 있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작전상의 이유로 폭격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무려 1,000년 동안이나 정신과 영혼을 지킨 성스러운 곳이었으나, 독일군이 진을 치고 있는 한 산 아래에 있는 연합군에게는 강력한 나치의 상징으로 보일 뿐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보존과 파괴 사이에서 애매한 입장을 취했고 연일 사상자가 발생하자 여론은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날려버려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1944년 2월 15일, 대규모 공중 폭격이 가해져 그 웅장한 수도원은 산산조각이 났다. 연합군은 환호했으나 바티칸의 추기경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은 이를 ‘어마어마한 실수’라고 생각했고 연합군에 대한 세계 여론은 악화되었다. 그리고 미국 미술계는 당시만 해도 활동이 미미했던 기념물 전담반을 정예화하기 위해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 작전 중인 미군 포병부대의 중위 제임스 해밀턴 딜은 덕수궁에 인민군이 모여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포격을 할지 말지 고민한다. 전세를 잡기 위해서는 포격을 해야 했지만 만일 그렇게 하면 덕수궁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해밀턴 중위는 수기에서 이렇게 밝혔다.
“결국 나는 앤더슨 대위와 상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 생각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우리는 이에 대해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고, 또한 이와 비슷한 경우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있었던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이 고궁을 살리는 데 최대한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수난의 문화재』(문화재청, 2008) 중에서
- 역자의 말 중에서 재인용
기념물 전담반의 역사는 의외로 이렇듯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 우리에게도 기념물 전담반같은 역사가 있다 - 리영희 선생의 일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겨울.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가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다가 설악산의 신흥사에 마련된 임시 연대에 도착했다. 병사들은 판자를 들고 나와 불을 때서 몸을 녹였는데, 이때 어느 장교가 모닥불 장작을 보고 깜짝 놀라 이를 저지했다. 목판의 가치는 정확히 몰랐지만 귀한 문화재인 것은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조선 효종 때 제작된 불경 목판으로, 한글과 산스크리트어 대역으로 이루어진 귀한 물건이었다. 이 물건을 알아본 이는 바로 故 리영희 선생이다.
“사실인즉 나는 불교신도도 아니었으며, 어떤 종교도 없는 청년이었다. …… 군대의 많은 장병들에게는 38도선을 넘으면서부터 ‘점령지’라는 생각이 앞서서 모든 것이 파괴와 노획의 대사처럼 비치는 성싶었다. 같은 조상들이 남기고 물려준,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언젠가는 다시 한겨레로서 함께 소유하고 함께 향유해야 할, 그리고 다시 후손에 남겨주어야 할 겨레의 재물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모두가 노획과 처분의 대상이었다.”
『스핑크스의 코』(까치글방, 1998) ‘신흥사 경판이 오늘 남아 있는 까닭’ 중에서
리영희 선생의 이러한 일화를 보건대‘기념물 전담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대가 없었을 뿐, 우리에게도 전쟁 중에 비슷한 임무를 수행한 부대, 혹은 개인이 있지 않았을까. 『모뉴먼츠 맨』의 저자 이전에 이를 연구한 학자가 한 사람도 없었듯이, 우리에게도 다만 이를 연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묻혀 있는, 세상이 조망해주기를 기다리는 예술품 수호대가 있지 않을까.
■ 왜 우리는 어딘가에 있을 기념물 전담반을 찾지 않는가?
2011년 5월,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이 환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故박병선 박사로 지난해 11월 타계했다. 고인은 1978년 외규장각 의궤를 프랑스에서 발견하고 국내외에 그 사실을 알리면서 반환 운동을 주도했다.‘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해 세계 활자사를 바꾼 것도 그였다.
간송 전형필은 사재를 털어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등 국보급 문화재들을 구입하였고, 전쟁 중에 피난도 가지 못하고 그 문화재들을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모뉴먼츠 맨』처럼 정식으로 꾸린 부대는 아니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혹은 잃어버릴 뻔한 문화재들을 지킨 이들이 이렇듯 눈에 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모뉴먼츠 맨』처럼 이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새롭게 조명하지 않을까. 일제 강점기에 광화문 철거가 논의되자 이를 적극 반대한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이는 여러 각도로 조명되었는데 왜 ‘우리의 기념물 전담반’에 대해서는 이토록 알려진 게 없을까. 우리에게도 어쩌면 모뉴먼츠 맨과 비슷한 임무를 띠고 활동한 부대, 혹은 단체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좀 더 적극적인 발상도 가능하다. 만약 피치 못하게 분쟁지역에 우리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면, 기념물 전담반 같은 미술품 보존 부대를 편성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도 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파괴되었지만 이를 통해 교훈을 얻어 우리 덕수궁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부대가 또 어떤 전쟁터에서 인류의 유산을 지켜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모뉴먼츠 맨』의 극적이고도 숭고한 이야기에 영감을 받은 할리우드 배우 조지 클루니는 이를 영화화하는 데 감독이자 배우로서 참여할 예정이라고 밝혀 전 세계에 보도되기도 했다.
■ 본문 속으로
루브르 같은 위풍당당한 박물관 안을 걸어본 사람 중에서, 샤르트르 대성당의 적막을 느껴본 사람 중에서, 혹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같은 걸작을 구경한 사람 중에서 이런 생각을 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많은 기념물과 위대한 예술품은 어떻게 전쟁의 참화를 피해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이 찬란한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헌신한 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 20쪽 ‘저자의 말’ 중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수년 동안 자신의 비전을 그리고 또 그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인종차별적 동기에서 비롯된 제국지도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재산 압류는 미술품 약탈 작전으로 바뀌고, 위대한 제국원수로 임명된 헤르만 괴링의 끝없는 야심은 착취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법률은 유럽의 위대한 미술품을 자신의 수중에 움켜쥘 근거였다. 일단 손에 넣은 예술품은 이용 가능한 모든 보관시설에 욱여넣고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미술관에 전시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 본문 47쪽
진주만이 공격을 받은 직후, 미국의 긴장은 당장이라도 행동을 개시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로 바뀌었다. 일본이나 독일 혹은 양국 모두가 미국의 주요 도시까지 공습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던 것이다. 보스턴 미술관은 분노한 폭도의 공격을 받을까 우려한 나머지 일본 전시실을 아예 폐쇄했다. 볼티모어 소재 월터스 미술관은 전시대에서 금과 보석 전시품을 치워버렸다. ……뉴욕 시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해가 지면 문을 닫았는데 이는 등화관제 중에 관람객이 자칫 물건이나 회화를 훔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프릭 컬렉션은 아예 창문과 채광창을 검게 칠해 혹시나 적의 폭격기가 나타나도 맨해튼 한가운데에 있는 그곳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본문 51쪽 이미 200만 점 이상의 유럽 소재 작품들이 적절하지 못한 임시 창고에 있었고 종종 적의 폭격을 받아가며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 이동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전쟁의 화마 속에서 구해낸 작품을 집계한 것이 그 정도였다. 나치에게 대규모로 약탈당한 작품의 숫자는 계산조차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 본문 57쪽
1943년 초, 스타우트는 보스턴 미술관에서 근무하는 보존 전문가 W.G. 콘스터블과 함께 영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당시 런던 소재 국립 미술관 관장이던 케네스 클라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존 부대 창설 계획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 개념 자체를 어리석다고 판단한 클라크는 부정적인 답장을 보내왔다.
“설사 당신의 청원서에 담긴 제안을 실행할 만한 조직을 구성할지라도, 침공부대 하나하나마다 고고학자 한 사람씩 딸려 보낼지라도, 중요한 군사 목표물에 훌륭한 역사적 기념물이 있다는 이유로 거기에 사격을 가하지 말라고 작전 지휘관을 설득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본문 65쪽
“과연 이 임무를 위해 대규모 전문가 요원이 필요한 것인지조차 의구심이 든다네. 미술 전문가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총을 쏘지 말라고 하면 군이 달갑게 생각할 리 없지 않은가. 그들에게 이것은 사치일 뿐일세.”
최초로 기념물 전담반에 소속된 그조차 처음에는 육군에서 그 임무를 수행하려는 것이 어리석고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본문 79쪽
“불도저 멈춰!”
그가 소리를 지르자 공병이 깜짝 놀랐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손상된 성의 다른 벽도 무너트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로라이머는 보호 요망 기념물 목록을 치켜들었다.
“이것은 역사적인 건축물이니 절대 파손해서는 안 돼.”
잠시 후 그곳 지휘관이 잡석 더미를 넘어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나, 소위!”
상대방이 장교 중에서도 가장 낮은 로라이머의 계급을 굳이 붙여 말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기념물 전담반에게는 누군가를 향해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조언이었고 이곳 장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역사적 기념물입니다, 지휘관님. 그러니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됩니다.”
- 본문 128~129쪽
히틀러는 <겐트 제단화> 정도의 걸작품을 함부로 약탈하다가는 전 세계의 비난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전리품을 챙기는 것은 마땅하다는 정복자의 심보를 지니고 있었지만, 히틀러와 나치는 차후에 불거질 말썽을 고려해 일종의 우회 방법으로 약탈 활동을 ‘합법화’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과 절차를 마련했다. 새롭게 마련된 조치에 따르면 피정복 국가는 항복 조건으로 미술품을 담보로 내놓아야 했다.
- 본문 176쪽
대전시실을 이리저리 돌아보던 로라이머는 기둥 사이로 보이는 벽에서 눈에 띄는 단어를 발견했다. <라 조콩드(La Joconde)>. 이것은 <모나리자>를 가리키는 프랑스 이름이었다. 대부분의 작품은 한꺼번에 운송되었고 때로는 폭격의 피해를 입은 도로를 따라 움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화 <모나리자>는 어느 날 한밤중에 구급차의 들것으로 옮겨져 트럭에 실린 다음 홀로 운반되었다. 물론 트럭에는 큐레이터 1명도 타고 있었다.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짐칸은 완전히 밀봉한 상태였다.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 그림은 멀쩡했지만 큐레이터는 거의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짐칸이 밀봉되어 산소가 부족했던 것이다.
- 본문 185쪽
히틀러는 공식 평화조약을 이용해 이 나라의 문화적 자산을 합법적으로 장악할 기회를 만들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는 거의 150년 전에 나폴레옹이 일방적인 조약을 이용해 프러시아의 문화재를 장악했던 방법과 유사했다.
- 본문 187쪽
도시 중심부에는 조사할 만한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던 것은 대성당으로, 그것은 불모지의 한가운데에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 인상적인 광경은 연합군의 동정심을 드러내는 사례일 수도 있지만 행콕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독일군을 굴복시키기 위해 연합군이 행한 잔인무도한 파괴는 생각하기조차 고통스러웠다.
- 본문 340쪽
기념물 전담반이라고 번역했다.
1943년부터 1951년까지 활동한 소규모 연합군 부대를 가리킨다.
교회나 박물관 등 중요한 기념물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쟁 중에 강탈당하거나 실종된 예술품의 행방을 찾는 등
세계적 문화재를 수호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 모뉴먼츠 맨, 위기에 처한 예술품을 구해낸 제2차 세계대전의 숨은 영웅들
『모뉴먼츠 맨』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예술품을 구하고자 분투한 소규모 부대의 분투를 담은 역사 다큐멘터리다. 저자 로버트 M. 에드셀은‘뛰어난 미술작품들은 어떻게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았는가?’라는 질문 하나를 잡고 수년간 치밀한 조사와 집필 끝에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기념물 전담반은 세계 각국에서 모인 350여 명의 남녀로 구성되었지만 이 책에서는 특히 중요한 행적을 보인 요원 8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1944년 6월부터 1945년 9월까지 그 긴박했던 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 역사상 최초의 예술품 보존 부대, 나치의 욕망과 싸우다
군대가 문화적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따로 부대를 편성한다는 것은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 부대에 자원입대한 최초의 대원들 60여 명은 대개 중년으로, 박물관 관장, 큐레이터, 건축가 등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는 이들이었다. 초기 임무는 중요한 건축물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었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강탈당하거나 실종된 예술작품의 행방을 찾는 쪽으로 성격이 변했다. 특히 유럽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히틀러와 나치가 문화유물을 무려 500만 점이나 압수해 제3제국 영토로 이송했기 때문에 이를 추적하는 데 애를 먹었다. 히틀러가 미술품 약탈에 이토록 집착한 까닭은 고향인 린츠에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미술관을 세우고 걸작들로 그곳을 채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나치는 평화 협정의 담보물로 미술품을 압수하기도 했고, 때로는 특별한 이유 없이 강탈했다.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은 축재를 위해 비열한 약탈을 일삼았고 병사들은 액자에서 빼낸 그림들을 크기대로 분류하여 아무렇게나 상자에 넣은 뒤 곳곳에 마련한 보관소에 수만 점씩 은닉했다.
약탈 미술품 보관소는 1,000개 이상, 한 군데의 압수 건수만 2만 건이 넘어
히틀러가 린츠의 박물관으로 보내려고 한 국보급 문화재들 대부분은 오스트리아 알타우세 광산의 은닉처에 보관되었다. 알타우세 광산은 기념물 전담반이 발견한 가장 중요한 보관소 두 곳 중에 하나로, 소금 광산이었던 자리에 거대한 방들을 마련하여 어마어마한 수의 예술품을 은닉했다. 회화만 1,687점 이상 발견됐고, 얀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같은 걸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악할 만한 사실은 나치가 이 거대한 광산을 여차하면 파괴할 작정으로 폭탄까지 설치해놓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보관소 중 또 다른 하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다. 이곳에서는 로트실트 가문의 보석 컬렉션, 그리고 세계적인 수집가 피에르 다비트 바일의 소유였던 1,000개의 은 세공품 등 나치가 압수한 보물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다행히 나치는 압수 내역을 상세히 기록했는데, 압수 건수만 2만1,000건이 넘었다.
연합군이 독일 남부에서 발견한 약탈 미술품 보관소는 총 1,000개 이상이었다. 여기에는 회화 작품을 비롯해 교회 종, 스테인드글라스, 종교 관련 물품, 필사본, 와인, 금, 다이아몬드, 심지어 곤충 표본까지 있었다. 이 물건들을 포장하고, 분류 목록을 작성하고, 기록을 남기고, 원래 소유주가 있는 국가로 돌려보내는 데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수십만 점에 달하는 중요한 미술품, 서적 등은 아직까지도 행방이 묘연하다.
독일군의 양가죽 코트와 밧줄, 도르래로 인류의 걸작을 구하다
기념물 전담반이 알타우세에서 발견한 걸작 중에는 나치가 벨기에 브뤼헤에서 약탈해온 미켈란젤로의 <성聖모자> 상도 있었다. 이 작품은 16세기에 제작되어 미켈란젤로 생전에 이탈리아 밖으로 나간 유일한 작품이다. <성모자> 상은 전에도 약탈당한 역사가 있다. 1794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가 벨기에를 정복하고 약탈했다가 그로부터 20년 뒤에 나폴레옹이 패배한 다음에야 벨기에로 돌아왔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간 이 작품은 기념물 전담반의 뛰어난 요원들 중 하나인 조지 스타우트의 지휘 아래 다시 빛을 보았다. 과정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일단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얄타 회담이 타결되어 언제 알타우세가 소련의 점령지역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스타우트는 수많은 작품들 중 가장 먼저 옮겨야 할 작품들의 순위를 정했다. <성모자> 상은 단연코 첫 번째가 되어야 할 작품이었다. 요원들은 전리품으로 얻은 독일군의 양가죽 코트로 <성모자> 상을 둘둘 싸고 특별히 고안한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하여 손수레 광차에 올리고 좁은 선로에 실어 보냈다. 15세기 플랑드르 회화의 명작으로 불리는 <겐트 제단화>도 까다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은 접히는 몇 개의 폭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각각의 패널을 조심스럽게 나무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작품을 옮길 트럭 바닥에 가스 공격에 대비해 마련한 방수용지를 깔고, 그 위에 펠트 천을 한 겹, 그리고 커튼으로 만든 베개 모양의 완충재를 깔았다. 그 위에 나무 상자를 올려놓고 균형을 잡기 위해 다른 나무 상자를 빈 공간에 끼워 넣었다. 트럭에 작품을 실은 다음에는 펠트 천과 방수용지를 그 위에 또 깔고, 폭격으로 상황이 나빠진 도로 위에서 덜컹거리지 않도록 밧줄로 단단히 동여맸다. <성모자> 상과 <겐트 제단화> 포장에만 꼬박 하루가 걸렸고, 이 작품을 실은 트럭 뒤에 반궤도 차량 두 대가 따르는 가운데 150마일이나 달렸다.
■ 파괴와 보존, 승리와 패배,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에서 고뇌하다
책의 곳곳에서 아군과 적군을 막론하고 승리를 위해 파괴를 서슴지 않는 비인간성에 괴로워하는 이들의 고백이 드러난다. 또한 파괴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군인들과 명분 없는 파괴를 비난하는 여론의 대립이 엿보이기도 한다.
“만약 유명한 건물을 파괴하느냐 우리 병사들을 희생시키느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우리 병사의 생명이 월등히 중요하므로 그 건물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 본문 88페이지
아이젠하워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예술품 파괴는 정치적/군사적 고민뿐 아니라 단순한 무지 혹은 증오심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여러 성의 커다란 방마다 시커멓게 검댕이 묻어 있었는데 이는 독일인이든 미국인이든 구식 벽난로 쓰는 법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었다. 미군 병사 4명이 중요한 회화를 인근 마을의 젊은 여성들에게 애정 표시로 선물하기도 했다. 당피에르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패널화인 앵그르의 <황금시대> 바로 앞에 칵테일 바를 설치하기도 했다. - 본문 225-226페이지
혼란의 시기에 사람들은 한 끼 식사, 혹은 안전한 통행을 위해 중요한 미술품을 장사치들에게 넘기기도 했고, 나치가 만든 터무니없는 평화조약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가보를 빼앗기기도 했다. 전쟁의 편의를 위해 역사적 건축물을 함부로 파괴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기념물 전담반에게는 파괴를 저지할 수 있을 만큼의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출입금지판조차 부족하여 중요한 건축물에 표시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대원들이 타고 다닐 차량도, 파괴 정도를 기록할 사진기도, 타자기도 없었고 대원들끼리 업무 공조도 되지 않아 힘겹게 도착한 파괴현장에서 이미 동료 대원이 남기고 간 조사 흔적을 발견하고 허탈해지기 일쑤였다. 기념물 전담반은 영웅이긴 하였으나 독일인에 대한 증오(“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을 몽땅 찾아내는 일은 그런 광신도들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죽어버린 다음에야 끝날지도 몰라.” - 본문 319쪽), 전쟁의 부조리함(“독일군을 굴복시키기 위해 연합군이 행한 잔인무도한 파괴는 생각하기조차 고통스러웠다.”-본문 349쪽)으로 인해 고통 받는, 지극히 인간적인 영웅이었다.
■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무너졌지만 덕수궁은 살아남았다
1944년 이탈리아 볼투르노 산지에서는 기념물 전담반의 활동에 영향을 끼치고, 훗날 덕수궁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폭격이다. 독일군과 연합군이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그 지역에서 연합군은 산꼭대기에 있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작전상의 이유로 폭격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무려 1,000년 동안이나 정신과 영혼을 지킨 성스러운 곳이었으나, 독일군이 진을 치고 있는 한 산 아래에 있는 연합군에게는 강력한 나치의 상징으로 보일 뿐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보존과 파괴 사이에서 애매한 입장을 취했고 연일 사상자가 발생하자 여론은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날려버려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1944년 2월 15일, 대규모 공중 폭격이 가해져 그 웅장한 수도원은 산산조각이 났다. 연합군은 환호했으나 바티칸의 추기경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은 이를 ‘어마어마한 실수’라고 생각했고 연합군에 대한 세계 여론은 악화되었다. 그리고 미국 미술계는 당시만 해도 활동이 미미했던 기념물 전담반을 정예화하기 위해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 작전 중인 미군 포병부대의 중위 제임스 해밀턴 딜은 덕수궁에 인민군이 모여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포격을 할지 말지 고민한다. 전세를 잡기 위해서는 포격을 해야 했지만 만일 그렇게 하면 덕수궁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해밀턴 중위는 수기에서 이렇게 밝혔다.
“결국 나는 앤더슨 대위와 상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 생각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우리는 이에 대해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고, 또한 이와 비슷한 경우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있었던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이 고궁을 살리는 데 최대한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수난의 문화재』(문화재청, 2008) 중에서
- 역자의 말 중에서 재인용
기념물 전담반의 역사는 의외로 이렇듯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 우리에게도 기념물 전담반같은 역사가 있다 - 리영희 선생의 일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겨울.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가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다가 설악산의 신흥사에 마련된 임시 연대에 도착했다. 병사들은 판자를 들고 나와 불을 때서 몸을 녹였는데, 이때 어느 장교가 모닥불 장작을 보고 깜짝 놀라 이를 저지했다. 목판의 가치는 정확히 몰랐지만 귀한 문화재인 것은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조선 효종 때 제작된 불경 목판으로, 한글과 산스크리트어 대역으로 이루어진 귀한 물건이었다. 이 물건을 알아본 이는 바로 故 리영희 선생이다.
“사실인즉 나는 불교신도도 아니었으며, 어떤 종교도 없는 청년이었다. …… 군대의 많은 장병들에게는 38도선을 넘으면서부터 ‘점령지’라는 생각이 앞서서 모든 것이 파괴와 노획의 대사처럼 비치는 성싶었다. 같은 조상들이 남기고 물려준,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언젠가는 다시 한겨레로서 함께 소유하고 함께 향유해야 할, 그리고 다시 후손에 남겨주어야 할 겨레의 재물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모두가 노획과 처분의 대상이었다.”
『스핑크스의 코』(까치글방, 1998) ‘신흥사 경판이 오늘 남아 있는 까닭’ 중에서
리영희 선생의 이러한 일화를 보건대‘기념물 전담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대가 없었을 뿐, 우리에게도 전쟁 중에 비슷한 임무를 수행한 부대, 혹은 개인이 있지 않았을까. 『모뉴먼츠 맨』의 저자 이전에 이를 연구한 학자가 한 사람도 없었듯이, 우리에게도 다만 이를 연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묻혀 있는, 세상이 조망해주기를 기다리는 예술품 수호대가 있지 않을까.
■ 왜 우리는 어딘가에 있을 기념물 전담반을 찾지 않는가?
2011년 5월,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이 환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故박병선 박사로 지난해 11월 타계했다. 고인은 1978년 외규장각 의궤를 프랑스에서 발견하고 국내외에 그 사실을 알리면서 반환 운동을 주도했다.‘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해 세계 활자사를 바꾼 것도 그였다.
간송 전형필은 사재를 털어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등 국보급 문화재들을 구입하였고, 전쟁 중에 피난도 가지 못하고 그 문화재들을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모뉴먼츠 맨』처럼 정식으로 꾸린 부대는 아니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혹은 잃어버릴 뻔한 문화재들을 지킨 이들이 이렇듯 눈에 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모뉴먼츠 맨』처럼 이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새롭게 조명하지 않을까. 일제 강점기에 광화문 철거가 논의되자 이를 적극 반대한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이는 여러 각도로 조명되었는데 왜 ‘우리의 기념물 전담반’에 대해서는 이토록 알려진 게 없을까. 우리에게도 어쩌면 모뉴먼츠 맨과 비슷한 임무를 띠고 활동한 부대, 혹은 단체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좀 더 적극적인 발상도 가능하다. 만약 피치 못하게 분쟁지역에 우리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면, 기념물 전담반 같은 미술품 보존 부대를 편성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도 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파괴되었지만 이를 통해 교훈을 얻어 우리 덕수궁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부대가 또 어떤 전쟁터에서 인류의 유산을 지켜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모뉴먼츠 맨』의 극적이고도 숭고한 이야기에 영감을 받은 할리우드 배우 조지 클루니는 이를 영화화하는 데 감독이자 배우로서 참여할 예정이라고 밝혀 전 세계에 보도되기도 했다.
■ 본문 속으로
루브르 같은 위풍당당한 박물관 안을 걸어본 사람 중에서, 샤르트르 대성당의 적막을 느껴본 사람 중에서, 혹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같은 걸작을 구경한 사람 중에서 이런 생각을 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많은 기념물과 위대한 예술품은 어떻게 전쟁의 참화를 피해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이 찬란한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헌신한 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 20쪽 ‘저자의 말’ 중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수년 동안 자신의 비전을 그리고 또 그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인종차별적 동기에서 비롯된 제국지도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재산 압류는 미술품 약탈 작전으로 바뀌고, 위대한 제국원수로 임명된 헤르만 괴링의 끝없는 야심은 착취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법률은 유럽의 위대한 미술품을 자신의 수중에 움켜쥘 근거였다. 일단 손에 넣은 예술품은 이용 가능한 모든 보관시설에 욱여넣고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미술관에 전시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 본문 47쪽
진주만이 공격을 받은 직후, 미국의 긴장은 당장이라도 행동을 개시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로 바뀌었다. 일본이나 독일 혹은 양국 모두가 미국의 주요 도시까지 공습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던 것이다. 보스턴 미술관은 분노한 폭도의 공격을 받을까 우려한 나머지 일본 전시실을 아예 폐쇄했다. 볼티모어 소재 월터스 미술관은 전시대에서 금과 보석 전시품을 치워버렸다. ……뉴욕 시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해가 지면 문을 닫았는데 이는 등화관제 중에 관람객이 자칫 물건이나 회화를 훔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프릭 컬렉션은 아예 창문과 채광창을 검게 칠해 혹시나 적의 폭격기가 나타나도 맨해튼 한가운데에 있는 그곳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본문 51쪽 이미 200만 점 이상의 유럽 소재 작품들이 적절하지 못한 임시 창고에 있었고 종종 적의 폭격을 받아가며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 이동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전쟁의 화마 속에서 구해낸 작품을 집계한 것이 그 정도였다. 나치에게 대규모로 약탈당한 작품의 숫자는 계산조차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 본문 57쪽
1943년 초, 스타우트는 보스턴 미술관에서 근무하는 보존 전문가 W.G. 콘스터블과 함께 영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당시 런던 소재 국립 미술관 관장이던 케네스 클라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존 부대 창설 계획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 개념 자체를 어리석다고 판단한 클라크는 부정적인 답장을 보내왔다.
“설사 당신의 청원서에 담긴 제안을 실행할 만한 조직을 구성할지라도, 침공부대 하나하나마다 고고학자 한 사람씩 딸려 보낼지라도, 중요한 군사 목표물에 훌륭한 역사적 기념물이 있다는 이유로 거기에 사격을 가하지 말라고 작전 지휘관을 설득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본문 65쪽
“과연 이 임무를 위해 대규모 전문가 요원이 필요한 것인지조차 의구심이 든다네. 미술 전문가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총을 쏘지 말라고 하면 군이 달갑게 생각할 리 없지 않은가. 그들에게 이것은 사치일 뿐일세.”
최초로 기념물 전담반에 소속된 그조차 처음에는 육군에서 그 임무를 수행하려는 것이 어리석고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본문 79쪽
“불도저 멈춰!”
그가 소리를 지르자 공병이 깜짝 놀랐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손상된 성의 다른 벽도 무너트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로라이머는 보호 요망 기념물 목록을 치켜들었다.
“이것은 역사적인 건축물이니 절대 파손해서는 안 돼.”
잠시 후 그곳 지휘관이 잡석 더미를 넘어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나, 소위!”
상대방이 장교 중에서도 가장 낮은 로라이머의 계급을 굳이 붙여 말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기념물 전담반에게는 누군가를 향해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조언이었고 이곳 장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역사적 기념물입니다, 지휘관님. 그러니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됩니다.”
- 본문 128~129쪽
히틀러는 <겐트 제단화> 정도의 걸작품을 함부로 약탈하다가는 전 세계의 비난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전리품을 챙기는 것은 마땅하다는 정복자의 심보를 지니고 있었지만, 히틀러와 나치는 차후에 불거질 말썽을 고려해 일종의 우회 방법으로 약탈 활동을 ‘합법화’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과 절차를 마련했다. 새롭게 마련된 조치에 따르면 피정복 국가는 항복 조건으로 미술품을 담보로 내놓아야 했다.
- 본문 176쪽
대전시실을 이리저리 돌아보던 로라이머는 기둥 사이로 보이는 벽에서 눈에 띄는 단어를 발견했다. <라 조콩드(La Joconde)>. 이것은 <모나리자>를 가리키는 프랑스 이름이었다. 대부분의 작품은 한꺼번에 운송되었고 때로는 폭격의 피해를 입은 도로를 따라 움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화 <모나리자>는 어느 날 한밤중에 구급차의 들것으로 옮겨져 트럭에 실린 다음 홀로 운반되었다. 물론 트럭에는 큐레이터 1명도 타고 있었다.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짐칸은 완전히 밀봉한 상태였다.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 그림은 멀쩡했지만 큐레이터는 거의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짐칸이 밀봉되어 산소가 부족했던 것이다.
- 본문 185쪽
히틀러는 공식 평화조약을 이용해 이 나라의 문화적 자산을 합법적으로 장악할 기회를 만들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는 거의 150년 전에 나폴레옹이 일방적인 조약을 이용해 프러시아의 문화재를 장악했던 방법과 유사했다.
- 본문 187쪽
도시 중심부에는 조사할 만한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던 것은 대성당으로, 그것은 불모지의 한가운데에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 인상적인 광경은 연합군의 동정심을 드러내는 사례일 수도 있지만 행콕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독일군을 굴복시키기 위해 연합군이 행한 잔인무도한 파괴는 생각하기조차 고통스러웠다.
- 본문 340쪽